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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호 Nov 03. 2024

피 끓던 시절, 꼭 그래야만 했을까

오래 전 독서모임에서 발표하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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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왠지 석연치 않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도 되는 양 망설여진다.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대놓고 얘기한 적도 이제껏 없기 때문이다. 뭐 그리 대단하다고, 뭐 그리 비밀스럽다고 망설인단 말인가. 군대에서 겪었던 참혹한 이야기와 ‘구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니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 느낌이다. 최근에 자서전 쓰기 강의를 하다가 우연찮게 군대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 이야기를 꼭 한 번은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옮긴다.


  그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새파랗게(?) 젊은 아이들이었다. 기껏해야 스물 둘에서부터 많게는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집에서는 모두가 귀한 집 자식들이었고, 부모로부터 애지중지 대우받던 청춘들이었다. 그러나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한 것일까? 군대 집단에서 벌어졌던,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권 유린 행동들이, 중년이 된 나에게 이제는 낯설고 섬뜩하게만 다가온다.


  제대 후, 군대 동기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정말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도 몇 해뿐. 시간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갈수록 그들과 만나는 횟수도 적어졌고 점차 이야깃거리로서의 가치도 떨어졌다. 더구나 군대 동기가 아닌 사회인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여성분들 앞에서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마치 팔불출이나 하는 행동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고, 이야기하는 의미도 재미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기피하게 되고, 마침내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감을 느꼈다. 하지만 군대에서 받았던 트라우마는 종종 잠에서 꿈으로 나타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제대 후 10년, 20년, 30년이 지나고도 3년이 더 지났건만 지금도 아주 가끔은 군대 악몽이 재현되기도 한다.  


  이등병 때의 일이었다. 소대원들 모두 내무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간에 갑자기 취침등의 불빛이 환해졌다. 중대 고참이 소대원 모두를 깨운 것이다. 고참들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요즘 쫄따구들은 영 군기가 빠졌다며 인상을 쓰면서 다니곤 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진 것이다. 참다 못해 쫄따구들을 한따까리 해야겠다며 그 새벽에 모두 흔들어 깨웠다. 이등병뿐 아니라 일병도 상병도 모두 긴장하는 눈치였다. 결국 올 것이 왔다. 침상 앞에 도열한 이병, 일병, 상병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잔뜩 긴장한 채 고참의 날벼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상병부터 일병, 이병 순서로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있던 나는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긴장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고참은 두꺼운 점호판을 내 옆목에 겨누고 힘껏 내리쳤다. 별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폭죽이 터지듯 별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잠시 기절할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또, 한 번은 평화로운(?) 일요일이었다. 우리 소대 고참이 중대 전체를 집합시켰다는 소식을 바로 윗고참으로부터 접하고는 즉시 강당으로 올라갔다. 속으론 떨고 있었다. ‘곧 날벼락이 떨어지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중대원 모두는 다들 긴장한 채 일렬로 도열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내 바로 아래 후임이 친 사고 때문이었다. 뭐 딱히 문제랄 것도 없고 잘못이랄 것도 없는데, 중대 전체의 군기를 잡기로 마음 먹은 고참은 한 놈을 시범 케이스로 콕 찍어 반쯤 죽여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긴장된 시간이 흐른 후 고참은 문제의 그 병사를 앞으로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던 다른 병사에게 시간을 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구타가 시작되었다. 시간을 재는 병사는 얼떨결에 시계에 집중하게 되었고, 고참은 문제 사병(?)을 군화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가슴팍을 얻어맞은 그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침상에 나가떨어졌다. 얻어맞으며 관등성명을 댔다. “이병 ○○○” 이윽고 재빨리 일어난 그는 맞을 자세를 취하며 다음을 기다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이어지는 구타에 그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냥 가슴팍과 군화발이 맞닿을 때 나는 둔탁한 소음만 있었을 뿐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아마도 5분을 쟀던 것 같다. 더 이상 맞으면 의무실에 실려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어떻게 됐을까. 런닝을 걷어 가슴팍을 보여주는데 가슴 전체가 온통 총 천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강당은 중대 집합 장소로 애용되던 곳이었다. 중대장이나 인사계의 감시망을 피할 수도 있고 소리없이 얼차려나 구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그곳을 대체할 만한 장소를 딱히 찾기도 어려웠다.


  “중대 집합이다.”

  “어디서 한답니까?”

  “강당”

  “오늘은 무슨 일 때문인지 김일병님은 아십니까?”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서둘러야겠다.”

  “네. 저도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강당에 도착하니 무거운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 모두가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며 다가올 일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군대에서 고참은 고양이요, 쫄따구는 쥐와 같았다.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이 쫄따구는 고참 앞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잠시 후, 오늘의 얼차려를 관장할 고참님께서 도착하셔서 쫄따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윽고 명령이 떨어졌다.

  “대가리 박아.”

  우리 모두는 번개에라도 맞은 듯 재빨리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갖다 대고 뒷짐을 지고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앞으로 전진.”

  대가리를 시멘트 바닥에 갖다붙인 채 앞으로 밀고 나갔다.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마가 벗겨지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모두가 참고 견뎠다.

  얼차려가 끝나고 나서 다시금 평온이 찾아온 후, 까진 이마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봤다. 진물이 흐르기도 하고, 다시 아물기도 하고, 벗겨진 살이 마르고 딱지가 엉겨붙고, 다시 진물이 나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이 흐르며 상처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빨아놓은 양말을 걷어서 개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를 집중적으로 괴롭히던 한 고참은 두들겨 패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고양이같은 눈으로 나의 행동 하나 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뭔가를 꼬투리 삼아 벌을 내렸다. 내 가슴팍에 돌려차기를 꽂아넣은 것이다. 그 순간 내 목에 걸고 있던 군번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풀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돌려차기’로 말할 것 같으면 나만큼 잘하는 사람이 중대 내에 없었다. 사회에 있을 때 무술을 연마했고, 발차기 실력 만큼은 중대 내에서 나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태권도 수련 시간에 발차기 시범을 보이고 자세 지도를 내가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이 깡패’라는 말처럼, 나는 그들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아야 했다.


  한 번은 우리 부대에 파견 나온 병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군대와 구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 부대 소속이 아니었기에 계급과 상관없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는데 그의 지론은 꽤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군’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을 죽이기 위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났을 때 군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군을 죽여야 한다. 전쟁을 위해서 훈련하고 학습하는 것이 군인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폭력’을 의미하고, 그 폭력은 평화 달성을 위해 정당화된다.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 군인의 존재 이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을 학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타도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를 외쳤는데 대원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전쟁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터에서 명령 불복종이나 하극상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군대 내에서 평시에도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령에는 정당한 명령도 있고 부당한 명령도 있을 것인데 이 모두에 토를 달지 않고 따르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고, 그러기에 구타에도 적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돌격 앞으로”를 부당한 명령이라면서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인권을 유린하는 행동이라고 전쟁터에서 항변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퓨리(Fury)’라는 영화가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그 영화에서 워 대디(브래드 피트)는 신병인 노먼에게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포로가 된 독일군을 쏴죽여보라는 것이었다. 전쟁을 앞으로 계속 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영화에서 다루어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폭력을 동반한다. 그것을 준비하고 학습하는 것이 군인이므로, 군인이 폭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렵다. 군대에는 폭력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가. 요즘의 가치관을 따른다면 구타라는 것은 인권 유린 행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그 당시 군대에서의 구타는 공공연하게 용인되는 관습같은 것이었다.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가 반드시 있어야 하니, 군대는 ‘필요악’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피 끓는 청춘들이 모인 그곳, 군대.


  선량한 그들은 왜 그토록 악해질 수 있었을까? 두들겨 패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고, 두들겨 맞지 않고는 잠이 오지 않았던 그들. 집에 가면 귀한 집 자식인 그들. 그들에게 누가 악을 가르쳤을까?


  나는 계급이 한 단계씩 올라가고 마침내 병장이 되어서도 후임들을 구타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말한다. “맞은 만큼 쫄따구들에게 돌려주지 그랬어.” 그러나 내가 후임들을 구타했다면 그들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술로 단련되어있던 내 몸은 살인 병기에 가까워서, 내가 손을 댔다면 그들이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쫄따구들을 교육시킬 사람은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내가 후임들을 구타하지 않았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폭력을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폭력은 ‘선(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군에서 군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구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또래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동네 아저씨도 과거의 한 때는 혹독한 군 생활을 견디며 피 끓는 젊음을 바쳐 국가에 헌신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누구보다 치열했을 그들 자신마저도 세월에 둔감해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웃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흔히 감사해야 할 사실을 잊고 사는 때가 많다.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있는 것이 감사하고, 걸어다닐 수 있는 다리가 있어서 감사하고, 아직 녹아내리지 않은 빙산이 있어서 감사하고, 푸른 하늘과 깊은 대양이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국가가 있기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고, 군대가 있고 군인이 있기 때문에 국가 안보가 유지된다. 군인은 전쟁을 대비해 훈련해야 하고,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군인이 국가와 국민을 적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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