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일 차는 라마 섬(Lamma Island)을 구경하기로 했으나, 라마 섬만 돌기에는 시간이 남을 듯하여 찾아보다가 '만불사'가 눈에 띄었다. 구경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았지만 가능하면 관광 스폿으로 알려진 곳은 피하고 싶었는데, '만불사'는 굳이 찾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여서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불사(萬佛寺)
만불사(萬佛寺)는 지역으로는 신계(New territories)에 위치해 있으며, 영화 '무간도 1'의 초반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사실 좋아하는 영화에 나온 곳이라 겸사겸사 가보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샤틴(Sha Tin)역에서 만불사의 초입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데, 함정은 그곳이 만불사로 가는 길의 극히 초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등반을 한다는 기분으로 끝없이 늘어선 각양각색의 불상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30여 분이나 지나서야 실제 만불사의 모습이 겨우 보인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났다. 사진 찍은 걸 보고 부모님은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곳 같다며 웃으셨다.
불상의 붉은 입술색이 강렬하다.
언뜻 보면 얕은 구릉 정도의 경사이지만, 만만히 볼 오르막길이 아니었다.
불상의 얼굴, 앉아 있는 자세 등 같은 불상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이번 여행은 휴식하러 온다고 마음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산길을 구태여 찾아 올라가며 셀프 혹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 기질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각기 다른 불상의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오르다 보니, 머릿속에서 잡념이 서서히 씻겨 내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30분을 꼬박 올랐지만, 절 입구에 다다르니 되려 마음은 상쾌해져 있었다. 몸의 휴식도 중요하지만 머리의 휴식도 중요하지, 암.
문 여는 시간에 딱 맞춰 와서 그런가, 만불사 관계자 말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천천히 절 내부를 돌며 구경할 수 있었다. 나름 모태신앙은 가톨릭인데, 여행을 오면 이렇게 꼭 사찰을 찾게 된다. 되짚어보면, 그 나라만의 분위기와 문화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발걸음을 이끌게 하는 것 같다.
'무간도 1'에 등장한 곳은, 사찰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독 팔이 긴 불상의 모습이 영화 내에서도 인상 깊게 남아 있었는데, 역시나 바로 눈에 띄었다.
영화 초반, 조직의 두목인 한침(증지위)는 갓 들어온 신입들을 교육하며 부처님 앞에서 술잔을 들고 조직에 충성하는 맹세를 하게 한다. 앳된 신입들 중에는 유건명(유덕화)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침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생과 사는 자신이 결정한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선택해라.
이는 유건명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말을 되는데, 훗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게 될지는 한침은 꿈에도 몰랐을 테다. 우리 조직은 다른 곳과는 다르다며 한침은 이렇게 강조하지만, 생각해보면 반쯤은 허울뿐인 말이기도 하다. 말단 조직원에게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조차 거의 주어지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한참 올라온 길을 또 언제 내려가나 눈앞이 아찔했지만, 또 불상들을 차근차근 보며 내려가는 재미가 있었다. 만불사로 올라올 길은 이 길 하나뿐이었는데, 문득 한침과 그 패거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더운 날 만불사로 오르는 광경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게 영화 배경으로 나온 곳을 찾아가는 묘미일까. 영화에 비친 모습, 혹은 영화 내에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있었을 법한 장면을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만불사를 내려오자 드디어 전날 먹은 오리고기가 좀 소화가 되었는지 배꼽시계가 신나게 울려댔다.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먹어보지 못했던 콘지(죽 요리)를 먹어보기로 했다. 홍콩에는 먹을 음식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매번 다른 메뉴를 먹는 재미가 있다.
사진을 맛깔나게 찍지 못해서 도 아쉬운데, 상상 이상으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쇠고기 콘지를 먹었는데, 살며시 얹힌 고수와 생강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콘지는 우리나라의 죽보다는 좀 묽었는데, 후룩후룩 먹기에 부담이 없었다. 간도 세지 않고 적당해서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추가로 시킨 튀긴 빵도 짭조름하니 죽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는데, 야식으로 먹기에도 부담이 없을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마 섬(Lamma Island)
배를 두둑이 채운 뒤, 2일 차의 주 목적지인 라마 섬으로 향했다. 라마 섬은 해산물과 트래킹 코스로 유명한데, 주윤발 아저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인구가 만 명이 넘는 데도 불구하고 섬 내에는 자동차가 없고, 3층이 넘는 건물은 지을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약간 현실과 동 떨어진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동차의 소음이 없기에 고요하고, 높은 빌딩이 없기에 시야가 편안하다.
청록빛 바다가 바람을 따라 때때로 일렁거리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닷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작은 배들. 어촌 마을답게 해안가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라마 섬의 이동 수단은 도보 아니면 자전거 두 종류뿐이다.
센트럴에서 라마섬 용수완, 혹은 소쿠완 선착장으로 가는 페리가 2종류 있는데, 일단 사람들이 많이 택한 용수완 선착장으로 가기로 했다. 라마 섬에 도착하니, 역시나 날씨가 흐려서 파란 하늘을 못 보는 건 아쉬웠지만, 트래킹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왔어 유유자적하기 딱 좋겠구나 싶었다.
구름 가득 낀 하늘. 되려 한국보다도 선선했다.
멀리서 보이는 풍력 발전기.
해안가를 천천히 따라 걷다가 트래킹 코스로 들어갔는데, 초입에 냉두부 집이 있었다. 트래킹을 하려면 당분을 충분히 섭취해둬야지 하면서 한 그릇 시켰는데, 약간 갈증이 나던 차에 천국이나 다름없는 시원함을 선사했다. 설탕 시럽이 냉두부와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컬처 쇼크였다. 나중에야 이 냉두부가 라마 섬의 명물이라는 걸 알고는, 바로 납득했다. 맛있을 수밖에 없었어.
로컬 느낌이 물씬 난다는 표현은 이곳에 딱 어울리겠다 싶었던 두부 가게.
한 그릇 가득 담긴 냉두부에서 느껴지는 인심.
그리고는 2시간 반가량을 느긋하게 걷다가, 쉬다가, 멈춰 서서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면 더 여유 좀 부렸어도 충분한 시간이었는데 왜 그리 서둘러 다녔는지 모르겠다.
라마 섬에 혼자 있는 것 모양 트래킹 하는 내내 인적이 정말 드물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즐거운 고독함을 만끽할 수 있다니 의외였던 라마 섬.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서 트래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즐길 수 있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해변가, 홍싱예 해변/Hung Shing Ye Beach(洪聖爺灣泳灘). 아직 성수기는 아닌지 한적했다. 하긴, 해변가에서 햇볕을 즐기려면 날씨가 좀 더워야 제맛이긴 하다.
해변가 한 구석에는 바비큐를 즐길 수 있게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며 바비큐를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다시 하이킹 트랙으로 올라섰는데, 내려다 보이는 바다 경치나 정말 예뻤다. 손대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그 뒤로도 이따금씩 지나가는 몇 무리를 제외하면 혼자 전세를 내고 트래킹 하는 기분이 참 신선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해변가, 소쿠완 선착장 부근에 위치한 Lo So Shing Beach(蘆鬚城泳灘). 안전 요원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도 없었다.
소쿠완 선착장에 이르기 직전에, 일본이 잠시 홍콩을 잠시 점거하던 시절, 배를 숨겨놨다던 동굴도 눈에 띄었다.
트래킹이 끝나가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 소쿠완에서 유명하다는 레인보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혼자 먹기는 부담스러운 메뉴 일색이라 결국 주문한 건 오징어 튀김, 계란 볶음밥, 그리고 산 미구엘 1병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기본적인 메뉴가 맛이 좋던지. 무심한 얼굴로는 유리잔의 차가 사라져 가면 조용히 채워주고, 유리잔의 맥주가 사라져 가면 또 조용히 따라주던 친절함이 분위기와 맛을 더해줬을지도 모르겠다.
오징어튀김은 대체 뭘로 튀긴 건지 우리나라에서 먹던 그 튀김이 아니다. 튀김옷이 그렇게 느끼하지도 않으면서도 적당히 간이 되어 있어서 맥주랑 같이 파워 흡입했다. 계란볶음밥은 속에 새우 몇 마리가 숨어 있었다. 서프라이즈!
라마섬으로 올 때는 돈을 내고 페리를 탔는데, 레인보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무료로 페리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첫 페리인 오후 4시 30분이 될 때까지 맥주를 음미하며 라마섬의 경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레인보우 레스토랑의 페리를 타는 곳은 유료 페리를 타는 곳과는 다르다며 몇 번을 설명해주던 계산대의 직원이 기억에 남는다. 누가 홍콩이 친절하지 않다고 하던가. 무심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 가려진 친절함은 분명히 존재했다.
레인보우 레스토랑의 페리는 되게 귀여운 사이즈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2층에 자리를 잡았다가 바닷바람을 아주 제대로 만끽했다. 덕분에 센트럴에 내릴 즈음에는 머리카락에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센트럴의 공용 선착장을 이용했는데, 이 때도 자그마한 배려에 다시 한번 감동. 흔들거리는 배에서 선착장으로 바로 내려야 하는 구조라 몸의 밸런스를 잡기 어려웠는데, 선착장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이 손을 잡아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너무 사소한 것에 오버하는지도 모르지만, 놓치기 쉬운 이런 사소함이 배로 감동을 준다.
몇 시간도 안 되는 트래킹을 했다고 그 사이에 기력을 소진해서, IFC몰의 스타벅스에서 텀블러를 사고 커피를 마시며 정말 '빈둥거린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결국 기념품으로 홍콩이 적힌 텀블러를 하나 구입했다.
그 뒤로는 배도 안 고프고, 아무 생각이 없어져서 구글맵을 뒤적거리는 중에 지역 타이쿠싱(Taikoo Shing)이 눈에 띄었다. 저번 여행에서 침사추이 쪽에서 갔던 CD Warehouse가 있기도 했고, 홍콩 섬의 동쪽 끄트머리로는 가보지를 않아서 버스를 타고 타이쿠싱으로 향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구경한 '시티 플라자'는 알고 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롯데월드 타워'같은 종합 쇼핑몰이었다. 지하인가에 아이스링크도 있다고 하는데 구경을 못한 게 아쉬울 따름. 시티 플라자 내의 CD warehouse에서 진혁신과 유덕화 아저씨의 CD를 1개씩 또 구입하고, 서점이 있길래 무슨 책이 있나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보통 여행을 오면 음반 가게라든지 서점 구경을 하지는 않는데, 나는 꼭 서점은 한 군데씩 들리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책 좋아하는 습성이 이런 데서 나온다니 사람의 무의식이 참 신기하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오후 8시가 다 되어 가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로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뻗어 버렸다. 오밤중까지 돌아다니는 짓은 더 이상 못하는 체력, 혹은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 약간 슬퍼진 하루의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