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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무 Feb 21. 2023

담배보다 짙은 여행 중독

"제주도에 숨겨둔 애인이 있어?
아니 애가 있는 거 아냐?"


한동안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최근 1년 동안 제주도행 비행기를 13번이나 탔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보러 갔던 것도, 일 때문에 갔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여행'이었다. 갈 때마다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현실 도피에 가까웠다. 눈을 뜨는 것이 지겨웠고, 눈을 감는 것이 두려웠다. 그즈음의 나는 생활 패턴에서의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촬영 기종 : 아이폰 8


"좋아하면 나약해지기 쉽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영상 제작 일은 중독성이 꽤 강하다. '아 다시는 안 해' 하고서도 아웃풋을 보면 또 하고 싶어지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아이처럼 신나 하며 자발적 야근을 강행한다. 무엇보다 지금 다니고 있는 광고대행사에는 광고팀과 협업하는 일뿐만 아니라 영상팀 자체 일들도 있기 때문에 거의 월 단위로 새로운 광고주나 새로운 프로젝트와 마주한다. 반복되는 일에 질릴 틈은커녕 적응하기도 바빠야 정상이다.

야속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질리게 만드는 요소들은 존재한다. 일에 있어서 반복되는 좌절감, 매일 보는 동료들, 매일 보는 길거리 모습, 매일 눕는 침대 등.

일하면서 느낀 좌절감을 제외하고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좋아했기 때문에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은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편안함이 지속되며 결국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관했다. 지옥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평화'와 '나태'는 정말 한 끝 차이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낀 권태로움에 오랫동안 빠져 살았고, 이대로 간다면 내 인생에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화광반조 回光返照
*연출했던 뮤직비디오의 엔딩컷

화광반조란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밝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임종에 이른 사람이 잠시 동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순간처럼.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아니 죽어가고 있었다. 일하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곪아가고 있었다. 시든 꽃처럼 메마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움켜쥐면 부서질 것 같았다. 실제로 5개월 동안 몸무게가 13kg나 빠졌기도 했고, 회사 동료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평일은 매일 야근, 주말엔 일이 아니라면 방에 틀어박혀 내내 잠만 자거나 킬링타임용 유튜브 콘텐츠들에 매몰되어 시간을 죽이곤 했다.


도망치다, 제주도로!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난 '반강제적'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당연히 해외를 가고 싶었지만, 광고회사 특성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무엇보다도 전 세계가 코로나로 마비된 상태였다. 결국 답은 제주도밖에 없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울릉도 등 자연이 유명한 곳도 많지만 유독 '제주도'가 끌렸다. '효리네 민박' 때문인가, '제주도'하면 '낭만'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렇게 떠나게 된 제주도. 핫플은 관광객과 중국인들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갈 생각조차 안 했다. 어딜 가도 서울에 비해서는 넘칠 정도로 한적했지만. 어쨌든 나는 시골 중에서도 최대한 사람의 흔적이 되도록 없는 곳을 찾아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네이버 리뷰 수가 거의 없는 오름을 찾아서 가기도 하고, 무작정 네이버 로드뷰를 보기도 하고(촬영 로케이션 찾는 습관이다.) 그저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곳, 느낌 좋은 곳을 찾아 발길이 닿는 데로 갔다.

자연 속에 홀로 있으면 이 지독한 세상 속으로부터 정화되는 것 같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 온 세상 가득한 천연 피톤치드 향. 그 순간만큼은 서울의 현실이 아닌 그곳에 나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걱정과 불만은 점차 사라지고,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하며, 벅차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고, 그 공간의 일부가 된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진정되면 그제야 사진과 영상을 남긴다. 이때 서울 촌놈인 내가 자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검정치마 - Everything 뮤직비디오 中
*검정치마 - Everything 뮤직비디오의 실제 촬영지

내 최애 장소 중 하나. 실제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에서 듣는 검정치마의 'Everything'은 상상 초월이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따사로이 내리 쐬는 햇빛 아래 일자로 길게 펼쳐져 있는 길. 그 끝에, 저 멀리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가 보인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 나무를 타고 흐르는 시원한 바람. 그것들과 함께 듣는 조휴일의 목소리는 황홀하다.

이 장소에 처음 갔던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기쁘거나 슬펐던 건 아니다. 지난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새기기도 하고, 씁쓸하고도 아련한 기분에 취해 길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겪어보지도 않은, 영화 같은 일이 모두 내게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겪어봐야만 느낄 수 있다.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


*검정치마 - everything 뮤직비디오


멋진 공간은 새로운 삶을 맛보게 해 준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준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정체 모를 감정들은 오묘하고 또 진귀하다. 물론 그 감정이 내가 느낀 감정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상에, 내 삶에 이유 모를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내가 가진 걱정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닐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세상이 어딘가에 있다고 말해준다.

그뿐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시적이지도 않은 큰 에너지를 준기도 한다. 그렇게 축적된 에너지로 나는 또 일상을 살아내고, 견뎌낼 수 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할수록 나의 믿음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그렇게 나는 짙고 깊은 경험을 통해 힘을 축적하고, 갈 때마다 더 성숙해진 모습의 나 자신을 마주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여행이 아닌 일상 속에 있어도, 축적된 에너지로 현실을 꽤 잘 살아낼 수 있게 되어간다. 일상에 조금은 감사할 줄 알게 되고, 이전에는 괴롭고 짜증 났던 일들이 점차 가볍고 쉽게 보인다. 그렇게 난 담배보다 짙은 여행 중독에 빠졌다.


(Part 2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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