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 누구보다 진심인 나(맹신하지는 않습니다)는 최소 매 달 한 번씩은 MBTI 검사를 한다. 나는 INFJ 인프제 (옹호자)인데, 지금껏 다른 MBTI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가끔 배고플 때(?)나 밀물처럼 쏟아지는 일 더미를 마주할 때 N과 F의 비율이 6-70% 정도로 낮아지기는 하지만 I와 J의 비율은 90% 내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나의 처음은 약 7년 전, 친한 친구와 함께였다. 우리는 하루 전까지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무계획을 계획하고 간 여행이었다.) 당장 예약이 가능해야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곳이나 예약할 수는 없었다. 하루의 끝이 끔찍한 기분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친구도 나도 원치 않았으니까.
우리는 바닷가 앞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바람을 맞으며 수십 개의 리뷰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의 열띤 검색 끝에 추린 2곳의 후보. 친구와 나는 의견이 갈렸고, 내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내기, 가위바위보를 하기로 했다. 친구는 가위, 나는 바위를 냈고 결국 내가 고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막상 내가 선택한 곳으로 가게 되니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부담감이 살짝 들었다.
그래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직감과 꽤 합리적 근거들. 수많은 리뷰 글들에 모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고, 무엇보다 사잔에 성인 남성만 한 큰 개 한 마리도 있었다. 친구는 걱정 말라며 본인이 운전해 가겠다며 나에게 오후의 감성에 맞는 음악을 틀도록 지시했다. 친구는 나보다 내 직감을 더 믿는 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Cyrille Aimee, Jill Barber와 함께 해안 도로를 달렸다. 30분 만에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의 2층 짜리 독채 펜션이었다. 그때도 이런 개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포틀락 파티를 하는 곳이었고 동네 누나 같은 사장님이 격하게 반겨주는 곳이었다.
*포틀락 파티: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식과 술을 준비해 오는 미국식 모임 문화
우리는 포틀락 파티의 정의를 제대로 몰라 닥치는 대로 회, 치킨, 족발 등 수많은 음식을 사갔는데,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다. 사장님이 술은 자기가 무한으로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음식이 맛있기도 했고 처음으로 겪어 본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낯가리는 것을 알고 친절한 사장님과 스태프분들은 천천히, 부담스럽지 않게 한 마디씩 말을 걸어주었던 것 같다.
마피아게임, 라이어게임을 하며 어느새 무르익은 술자리. 모두가 알딸딸한 채 말 끝에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술이 많이 취하셨는지 나의 처음을 본인과 함께해 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말씀해 주셨다.
(그 이후로 3개월 만에 그 게스트하우스는 문을 닫았는데, 연관이 있었을까 싶다.)
취기든 아니든 나에겐 사장님이 해주신 말씀은 아직까지도 애틋하고 아련하게 내 마음속에 굳건히 살아있다. 그날 함께 따뜻함을 공유하던 네 명의 게스트, 두 명의 스태프, 사장님, 그리고 귀여운 개 OO (강아지라고 하기엔 사람보다 컸다.) 모두의 눈빛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저마다의 미지근한 인생사를 들으며 쏟아질 듯 수백 개의 별들을 바라봤던 그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누군가 창밖의 붉은 태양을 가리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직까지 전하지 못했지만, 내게 새로운 세상의 첫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셔서 사장님께,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그렇게 낭만적인 첫 기억 덕분에 혼자서도 게스트하우스를 갈 용기가 생겼던 것 같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동네를 떠나본 적 없던 (5학년 때, 같은 아파트 6층에서 다른 동 7층으로 이사했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와 내가 대화를 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게 기특했다.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또 잘 듣는 법,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않는 법,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법을 배워갔다.
◎ '파티'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 사진과 내용은 특정 게스트하우스와 일체 관계없습니다.
게스트하우스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물론 이 첫 경험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파급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후에 갔던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매번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무언가 특별한 것을 얻고 오지는 않았다. 반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으며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도 난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에 빠져 최근 4년 동안 약 30개 이상의 게스트하우스를 다녔다. 물론 불순한 의도가 다분한 '파티'를 하는 곳은 철저한 사전 조사로 리스트에서 걸렀다. 그렇게 가게 된 곳들 정에는 여러 번 가본 곳도 있고, 1박도 하지 못하고 해가 뜨기 전에 도망 나온 곳도 있다. 세상엔 정말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많은 만큼 열정적으로 무례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움 없는 일상을 살며 느끼게 되는 적당한 우울과 무기력을 달래주는 삶의 '휴게소' 같은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휴게소는 화장실을 가거나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잠시 들릴 때도 있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기 위해 갈 때도 있다. 맛있는 호두과자나 회오리감자를 사 먹을 때도, 가끔은 살기 위해 잠을 잘 때도 있는 것처럼 게스트하우스도 경우에 따라 각기의 매력이나 특색이 조금씩은 달랐던 것 같다.
(휴게소 화장실에 붙어 있는 명언이 내 머릿속을 맴돌듯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말이 내 가슴속에 깊이 들어앉기도 했다.)
무엇보다 게스트하우스의 가장 큰 매력은 가기 전, 선택 과정에서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너무 급하게 당일날 아무렇게나 예약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수백 개의 게스트하우스 중에 나만의 조건을 따지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내가 지금 무엇을 갈구하고 무엇이 결핍한 지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된다.
[1] 1인실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키워드는 단연코 '1인실'이다.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는 도미토리(기숙사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 숙박을 하는 방식)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4인실에서 많게는 16인실도 있다. 10인실이 넘어가면 진짜 '잠'만 자거나 '짐'만 맡기는 장소로 쓰이기 일쑤다. 도미토리도 분명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거나,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공간 셰어를 통해 느끼는 바가 있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잠만 자는 장소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선택의 기준은 그저 '잠'만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시설이 좋고 깨끗한 게스트하우스라도 도미토리에서는 잠을 자지 않는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듯 '숙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누군가 한 명은 심하게 코를 골거나, 쉴 틈 없이 뒤척인다. 아무도 아니라면 내가 그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빌런 총량 불변의 법칙...)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는 것보다 주는 일이 더 두렵다. 잠을 자는 순간만큼은 온몸의 긴장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데, 그 시간마저 눈치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 괴롭다.
도미토리에 잤을 땐 항상 다음날 아침에 피곤한 상태로 눈을 뜨거나, 늦잠을 자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컨디션이 떨어져 제대로 여행을 못한다. 내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면 좋은 것을 봐도 좋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난 1인실, 도미토리가 함께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1인실에 묵는다. 평균 1-3만 원 정도만 더 지불하면 홀로 안락하게 잠을 잘 수 있다. 내 몸 상태, 기분에 따라 유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거나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하며 대화를 할 수도 있고, 내키지 않으면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낯선 사람들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만의 공간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다.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나만의 시공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가 있기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욱 즐겁게 느낄 수 있다. 언제든 내가 편하게 쉴 곳이 있으니 사람들과의 대화도 편안하고,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혹여 불편한 사람이 생기더라도, 잠시나마 악몽에서 벗어나 나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짧고 아쉬움이 남으니 오히려 더 애틋한 것 같다.
'아쉬움'은 여행을 지속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고, 그것이 또 묘미인 것 같다. 1인실은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인한, '나'의 여행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심지어 어떤 게스트하우스에는 1인실에 화장실(샤워도 가능한 곳)이 딸려 있는 곳도 있어 굉장히 편리하다.
[2] 마이너/마니아
너무 유명하거나 투숙 인원이 너무 많은 숙소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놀러 와서 늦게까지 소란을 피우는 무리, 이성을 만나러 오는 남녀, 배우자 몰래 젊은 친구들과 놀려고 오는 기혼자, 자신을 불투명하게 소개하며 영업(?)을 하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모인다. 군대보다 그 색깔이 더 다채롭다. 물론 그 어떤 것도 각자의 여행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막상 그런 사람들을 마주치면 오롯이 존중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정말 가끔은, 게스트가 아니라 사장님이나 스태프분이 말썽을 피울 때도 있다. 네이버 소개글과 홈페이지, 그리고 거실 게시판에 대문짝만 하게 명시된 소등 시간을 사장님 마음대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30분, 1시간의 양치/샤워 시간의 에누리가 아니라 해가 뜨거나 경찰이 올 때까지 무기한 연장되기도 했다.
한편, 스태프가 불필요하게 많은 곳도 있는데 가끔 그런 곳 중에는 게스트들이 아닌 본인들 노는 게 우선인 곳도 있다. 게하에서 만난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1인 여행객들만 받는 곳인데, 스탭이 본인 친구들을 한 명씩 따로 예약하게 해서 사장님과 다른 게스트들을 속이고 마치 에어비앤비처럼, 그들만의 파티 장소로 썼다고 한다. 나도 2번 이상 갔던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그 이후로는 발걸음을 끊게 됐다. (리뷰가 두렵지 않더냐...?)
이런 문제점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나는 '마이너한(매니악한)' 게스트하우스를 간다.
최대 인원 10명 이하
비교적 덜 유명한 (검색해서 잘 나오지 않는)
재방문자가 많은
리뷰(블로그 등)에서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지는
...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하는 비일상적인 대화.
이런 조건들을 갖춘 게스트하우스는 꽤 높은 확률로 서로를 배려하고, 좋은 대화를 하기 위해 오는 게스트들이 많다. 인원이 적기 때문에 대화 주제가 더 다양해지고, '딥'해진다. 친한 사람들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들도 주고받고, 무언가에 홀린 듯 속 깊은 이야기도 줄줄 하게 된다.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고, 때론 용기를 얻기도 한다. 조금 튀는 게스트분이 있더라도 사장님 또는 스태프가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케어하신다. 그럴 확률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그 게스트하우스의 문화를 좋아하고 이미 잘 알고 있는 재방문자가 많으니까.
[3] USP
이런 것과 별개로, 그 게스트하우스만의 'USP'가 있는 곳이라면 꼭 재방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USP : Unique Selling Point 상품이나 서비스가 경쟁사와 차별화된 고유의 강점이나 고유의 강점을 어필하는 전략, 마케팅 용어
게스트(사람)는 매번 바뀌지만, 그 게스트하우스 고유의 강점은 안 바뀌니까. 꼭 '파티'를 내세우지 않아도 게스트하우스는 충분히 각 공간만의 특색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다 다르며, 많은 곳들이 어떤 콘텐츠(프로그램)를 운영한다. 너무 상업적인 것들은 꺼리면서도, 꽤나 괜찮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곳들도 많다. 함께 불멍을 하며 대화를 하는 곳도 있고, 각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하는 곳도 있다. 뜨개질이나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하는 곳, 웰컴 티를 제공하며 사장님과 직접 스몰 토크를 하는 곳, 2박 이상 묵는 여행객들만 받고 청소 시간에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되는 곳도 있다. 사장님 부부와 함께 한 집에서 스테이 형식으로 자는 곳도 있었다.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은 다른 곳을 많이 다녀봐서 레퍼런스로 삼았든, 장사를 위해서든 사장님이 애정과 열정을 갖고 자신의 공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공간 자체에서도 인사이트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다.
이런 모든 조건들을 고려해도, 여행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바사 '사람 바이 사람'이다. 그럼에도 게스트하우스를 가는 이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이 주는 따뜻함과 차가움은 어떤 방향으로든 나를 성장시킨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모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쌓고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채로운 감정을 겪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겪었던 슬픔과 아픔도 이전에 느꼈던 것처럼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파티'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 사진과 내용은 특정 게스트하우스와 일체 관계없습니다.
게스트하우스는 좋은 사장님과 좋은 스태프, 좋은 게스트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게스트하우스가 '좋다'는 기준과 평가도 사람의 성향과 취향마다 다르고, 본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본인의 마음이, 기분이 어떠하냐에 따라 똑같은 일도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숙소가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숙소가 될 수도 있겠네요. 나에게 너무 좋았던 숙소도 그 다음에는 실망하게 될 수도 있고요. 다음 여행에는 어떤 게스트하우스가 어떤 모습으로 반겨줄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