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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무 Feb 07. 2023

72초만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

여행과 사랑 (feat. 오, 여정)

얼마 전, 알고리즘에 의해 72초TV의 역작 [오, 여정: 봄/경주] 몰아보기 통합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려 약 5년 전 작품이지만 72초TV의 작품들 중 단연코 내 최애다.

(박수칠 때 떠났던 그들, 언제 돌아오셔요?)


유튜브 홈에서 오랜만에 만난 여정이의 무표정이 너무 좋았다.

5개월 넘게 '집-회사-집'의 루틴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꽤 그리웠나 보다.

출근길 지하철 스크린 도어 앞에서 몇 년 만에 동창을 만난 기분이랄까.

(사실 난 도보 20분 거리의 회사에 다닌다.)

*출처: 72초TV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게 만드는 4:3의 화면 비율.

나른한 내레이션과 감각적인 앰비언트 음악들.

톤 앤 매너에 어울리는 정적인 구도감성적인 색감.

(*파나소닉의 GH5로 촬영했다고 알고 있다. 역시 장비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거슬리지 않는 은은한 유머감각적인 편집

여정이 그 잡채! 이소희 배우님.

(*예전에 같이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프로젝트가 엎어지면서 무산되었다. 언젠가는 꼭 함께 해요.)

단 하나도 내 취향을 저격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물론 극 J인 내게 극 P 느낌인 여정이의 여행은 낯설었지만.)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이 작품이 왜 좋은 지를 말하라고 하면 끝도 없다.

(무엇보다 '퇴사하고 떠나는 여행'이다. 말 다했다.)

벌써 네 번째 보는 작품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이고 내 감정에 따라 똑같은 장면도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N행시 속마음 연출, 아름다운 경주 풍경, 소름 돋게 들어맞는 음악 선정, 필름 효과, 애니메이션 연출 등 몰입되게 만드는 요소들의 향연이다.

(오, 여정에서 사용된 음악은 대부분 'audio network'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곳에 정말 좋은 음악들이 많다.)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여정이와 경주의 첫 만남.

둘은 트래블 로맨스의 최고라고 불리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기차에서 만났지만,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래서 더욱 좋았다.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꼭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실제로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것을 말 거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버스가 급정거해서 사람 무릎 위에 앉게 되는 것 모두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하고.

이런 현실적인 상황 설정이 보는 사람이 등장인물에게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 같다.

(배우님들의 외모는 매우 비현실적이네요.)

*출처: 72초TV

개인적으로 나는 로케이션 선정이 너무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주라는 곳은 이렇게 로맨틱하고 아련한 장소가 아닌 잘 기억 안 나는 학창 시절의 추억 정도겠지.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는 도시.

언젠간 여정이의 여정을 따라다녀 보고 싶다.

(경주시 공식 홍보영상으로 써주세요.)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어쨌든, 운명은 둘을 만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운명의 임무는 거기까지, 그 이후의 과정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결국, 누군가 용기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운명'처럼 다시 여정이를 본 순간, 경주는 고민 없이 가게를 나와 여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경주의 표현 방식은 투박하지만 투명했고, 그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출처: 72초TV

그래서 오히려 여정이가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정이는 고민 끝에 감사의 표시로 커피를 사기로 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던 경주의 온도가 여정이로 하여금 한 마디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들었던 것 같다. 서투름과 촌스러움이 멋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경주의 투명함은 그가 지닌 가장 따뜻한 무기가 아닐까.

무엇보다 위 장면은 편집도 너무 좋았다. 딱 2개의 클립만을 이용해 긴 호흡으로 이어나간 것이 이 묘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신지수 감독님의 섬세한 연출도 돋보였던 부분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 클로즈업과 과장된 대사를 넘어질 듯 신발끈을 푸는 경주의 액팅으로 대체했다.

*출처: 72초TV

(헐레벌떡 뛰어가는 경주. 투명하다 투명해. 운명을 인연으로 만드는 용기. 상대방에 대한 호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심,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아쉬움, 거절당해도 괜찮다는 자존감. 상대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움 등)

*출처: 72초TV

내게 있어서 사람, 관계(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기브 앤 테이크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균형을 갖춘 사람, 균형을 갖춘 관계가 좋다.

생각이, 가치관이, 감정이 극단적이지 않은 사람.

감정의 크기, 표현방식이 너무 달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은 관계.


누구나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은 실수하고, 무너질 수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즉 서로를 존중한다면 각자가 한 말과 행동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은 균형을 향해 나아가고, 그 사람을 균형을 갖출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본인이 여러 차례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사실을 스스로가 감당하기가 힘들다며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함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려 하지 않고, 그냥 회피해버렸다.

결국 우리는 균형을 갖춘 관계가 되지 못했다.

그 불균형(이기적인 사고 방식)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순식간에 조각난 관계. 슬펐고, 그 다음엔 안타까웠다.

그 균열의 틈을 마주하는 것은 평생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적 없었을까? 적어도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아야지.)

*출처: 72초TV

(컨버스 올스타. 첫 데이트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이라니. 경주스럽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보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아 잠시만, 다시 신발 신기 힘들겠는데?)

*출처: 72초TV
*출처: 72초TV

28’42

"떠날 거니까 다 좋은 거거든요. 원래 뭐든지 리미트라는 게 있어야지 뭐 아쉽고 좋고 그런 거예요."

- 경주의 대사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야기다.

틀린 말이 아니란 것은 알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떠나지 않을 걸 알아서 좋은 것은 정말 없을까.

꼭 아쉬움이 남아야만 좋은 것일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적어도 의도적으로 아쉬움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자칫하면 아쉬움이 후회로 남을 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처럼 뜨거워 보고도 싶다.


(Part 2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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