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1992) 아비코 다케마루
1980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한 재수생이 금속 야구방망이로 부모를 살해한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도쿄·사이타마에서 네 명의 여자 어린이가 희생된 '미야자키 사건'이 벌어진다. 이처럼 일본의 1980년대는 끔찍한 사건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으며, 여기에는 시대적 병리가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가사이 기요시는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품 해설에서 진단한다. 한편 극 중에서 스스로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남자 히구치는 범죄심리학에 정통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 자문한다. 이때 실제로 일어난 온갖 엽기 살인사건의 사례를 전해 듣는다.
이처럼 소설과 영화 등 창작물에 비해 현실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악마성은 훨씬 끔찍하다. 따라서 『살육에 이르는 병』을 두고 구역질 나고 해악만 가득하며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의 악취미가 아니라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변명해도 될 것이다. 물론 비위가 강한 사람도 거북함을 느낄 만큼 묘사가 잔혹하다. 적나라하게 폭력을 묘사한 소설이 많은 미스터리 분야에서도 드물게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신본격 미스터리의 계보에서 절대적 존재감을 확보한 걸작 반열에 오른 책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도쿄에서 신체 일부가 훼손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두 대학생 아이를 두고 있는 주부 가모우 마사코는 아들이 살인자인 건 아닐지 의심한다. 또 다른 쪽에는 희생자 중 한 명의 지인인 전직 경부 히구치 다케오가 있다. 주부와 은퇴 경찰. 두 사람의 추적이 만나는 결말에서 충격적 진실이 드러난다. 비밀은 이미 책의 첫 문장에서 이름이 밝혀진 범인, 가모우 미노루를 둘러싼 것이다. 작가는 오직 활자 매체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트릭을 사용해 범인의 정체를 감춘다. 작품에 쏟아진 찬사는 추리소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속임수에 기인한다.
강력한 트릭은 독자의 예상을 뒤집는다. 또한 트릭은 단지 퍼즐 맞추기 같은 유희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작가는 트릭의 내용 또한 '범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뒤틀림'이라는 주제 의식을 극대화하도록 설계한다. 여기에 짜임새 있는 추리 구조가 더해져 이를 뛰어넘는 신본격 잔혹 미스터리는 나오기 어렵다는 평을 들을 만큼 『살육에 이르는 병』은 독보적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다만 설정도 묘사도 과한 건 사실. 미스터리 팬이면서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도전해 볼 만한 문제작이다. 물론 스포일러를 극도로 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