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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환회 Mar 31. 2024

약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현대사회

화차(1992) 미야베 미유키

[세계 추리문학전집] 42/50


형사 혼마 슌스케는 강도 검거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일을 쉬고 있다. 사별한 아내의 조카가 어느날 혼마를 찾아온다. 그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약혼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약혼녀 세키네 쇼코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린다. 파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자취를 감춘 상태다. 세키네의 전 직장을 찾아다닌 혼마는 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세키네 쇼코를 잠적으로 내몬 주요 이유는 '빚'과 '욕망'이었다. 『화차』의 배경은 거품경제가 붕괴한 직후, 1990년대 초반 일본이다.



네온사인처럼 화려한 돈 잔치가 벌어지던 당시 일본인은 생각했다. "남처럼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사금융을 이용해 절제 없는 소비를 즐겼다. 돈을 끌어 오는 것을 가볍게 여겼던 시절이었다. 빚을 갚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른다. 자식이라는 이유로 채권자의 추궁에 시달린 죄 없는 여인. 쇼코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선택은 '자신보다 약한' 또 다른 죄 없는 여인을 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약자가 약자를 밟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설정이다.


책은 1992년에 발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2000년에 번역 출간된 후 2012년에 판매가 크게 뛰었다. 영화 때문이다. 당시는 눈덩이 같은 빚에 눌려 궤도에서 이탈한 삶을 묘사한 작품이 많지 않았다. '신분 갈아타기'라는 설정도 독자에게 충격을 줬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공포를 안긴 소설이라는 평이 주를 이뤘다. 다만 그로부터 10년, 책이 처음 공개된 1992년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보면 무서움은 덜하고 오히려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사고를 지금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다.


기이한 사건에 혼마는 홀린 듯 빠져든다. 작은 실마리를 연결해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추리의 재미가 탁월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본령은 '사회파 미스터리'다. 왜 인간이 죄를 짓는지 사회적 배경 서술에 집중한다. 혼마 또한 세키네 쇼코를 더 알고 더 이해하고 싶다고 느낀다. 살인, 시체 유기, 신분 탈취를 저지른 흉악범에 감정 이입해도 괜찮을까? 그 때문에 다소 많은 부분을 생략한 갑작스러운 엔딩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세키네 쇼코가 완전히 인간성이 말살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온기가 남아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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