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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Feb 06. 2021

<승리호> - ‘낙원은 하늘 위에만 존재하는가’

[영화 후기,리뷰/넷플릭스 신작, 한국, SF 영화 추천/결말 해석]

                                                                              

승리호 (SPACE SWEEPERS)

개봉일 : 2021.02.05. (넷플릭스 공개)

감독 : 조성희

출연 :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 리처드 아미티지, 박예린


낙원은 하늘 위에만 존재하는가


2021년 2월 첫째 주,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극장 개봉을 미루고 미루던 영화 <승리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한국의 우주영화’라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첫 항해를 내디딘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엄청난 스케일의 마케팅을 제외하고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우주영화를 주로 봐오던 관객들에게 우리나라가 만든 우주영화를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인지, 공개된 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넷상엔 <승리호>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오락영화와 새로운 장르 개척의 의미를 생각하면 충분히 칭찬 받을만하다는 의견과 뻔한 한국 영화, 우주 소재가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영화라는 의견이 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주관적인 것이니.. 우선 내 감상은 전자에 가깝다. 아쉬운 부분도 분명히 있다.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점,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는 이야기의 흐름 중 갑자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기시감과 결말.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 SF 영화 초심자의 눈엔 충분히 흥미로웠고, 영화의 초반 흐름과 방대하게 펼쳐지는 우주의 광경을 보며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개척지이자 미지에 가까운 ‘한국형 SF 영화’라는 장르를 향한 첫 도전이었기에 <승리호>의 제작과 발표는 의미와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꺼져가는 지구와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화성. 여전히 죽어가는 대지를 밟고 있는 사람들과 신이라도 된 듯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고 있는 남자. 인간의 본성을 탐욕과 야만이라 생각하는 남자와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했던 남자. 두 가지의 가치관과 하늘 위로 길게 뻗친 우주 정류장의 길이만큼이나 양극화된 계층구조. 말라가는 인류의 희망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애정. 흔히 ‘뻔한 한국형 신파’라고 불리기도 하는 감정이지만, 인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조금 더 잘라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평을 받았을 듯하지만.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좋을 것 같고, 다가오는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볼 오락영화로서도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다. 악평이 생각보다 많지만.. <인터스텔라>나 <스타워즈> 같은 SF 대작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 한국 우주영화의 첫 발걸음을 뗀 이 영화에 작은 관심을 보태보는 건 어떨까




승리호 시놉시스


2092년, 지구는 병들고 우주 위성 궤도에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UTS가 만들어졌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조종사 ‘태호’(송중기). 과거, 우주 해적단을 이끌었던 ‘장선장’(김태리). 갱단 두목이었지만 이제는 기관사가 된 ‘타이거 박’(진선규).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진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유해진). 이들은 우주쓰레기를 주워 돈을 버는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다.


어느 날, 사고 우주정을 수거한 ‘승리호’는 그 안에 숨어있던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다. 돈이 절실한 선원들은 ‘도로시’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계획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2092년, 인류는 숲이 사라지고 생명이 살 수 없게 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다. 위성 궤도에 만들어진 UTS의 새로운 보금자리이자 인류의 파라다이스. 하지만, 그곳엔 소수의 사람들만이 오를 수 있다. 지금의 지구와 영화 속 2092년 지구는 다르지 않다. 선택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승리호>에서는 그 다수의 인물들을 ‘지구에 남은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 청소부들의 모습으로 비춰내고 있다.


갈라진 바닥 틈에서 새로 자라난 아주 작은 새싹도 지구에선 금방 짓이겨져버리고 만다. 생명의 근원이었던 지구가 죽음이 되고, 죽음이었던 우주는 생명의 근원이 된다. 지구는 화성의 발전을 위해 수많은 물자를 빼앗기고 점점 더 죽어가고 있다. 간신히 숨을 쉬고 있을 뿐, 살아있다고 말하기엔 어려운 모습으로.



우주 낙원의 설립자 제임스 설리반은 152세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밭을 가꾸고 있다. 어릴 적 전쟁을 겪으며 모든 가족을 잃은 그는 같은 인류를 죽이고 해하는 인간의 파괴적인 본성을 혐오한다. 설리반은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우주 보금자리를 만든다. 죽음만이 있다고 생각했던 우주에 새롭게 피어난 푸릇한 도시는 인류의 희망이 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부분의 인류를 혐오스러운 종족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설리반은 기동대를 조직해 우주의 질서를 관리하려 하고, 살기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무단 입주를 선택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한다. 제임스 설리반은 전쟁과 죽음을 겪으며 그에 대한 공포와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었지만, 본인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악행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동대엔 소년병 태호가 있었다.



설리반은 신체능력이 뛰어난 태호를 특별채용했고, 태호는 설리반의 명령에 따라 그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사살한다. 죄책감이나 특별한 감정 따위는 사치였던 소년병 앞에 아주 작은 천사가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태호는 여느 때처럼 무단 입주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우주선에 오른다.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죽은 엄마의 품 안에 안긴 작은 아기 ‘순이’를 만나게 된다. 처음으로 연약한 생명을 마주한 날. 태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애정과, 이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렇게 20살의 나이에 순이의 아빠가 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해하지 못했고, 기동대장 자리에서 파면된다. 파면 후 길거리로 나앉은 태호는 1년의 방황을 겪고, 사랑하는 순이까지 잃고 만다. 그는 지켜주지 못한 딸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표면적으로 보면 UTS와 제임스 설리반은 꺼져가는 인류의 희망을 되살린, 새로운 생명의 창시자처럼 보이지만 그 뒷면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사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벌어진 계층구조가 존재했다. UTS와 대립하는 것은 승리호와 우주 청소부들, 그리고 꽃님이와 강현우 박사, 검은 여우단이다. 지구의 생명력을 빼앗고,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화성에 새로운 낙원을 만들어내겠다는 제임스 설리반의 목표를 알게 된 검은 여우단은 꽃님이를 지키고 지구를 살리기 위해 UTS에 대항한다. 검은 여우단에 비해 몸집이 컸던 UTS를 검은 여우단을 테러조직으로 만들고, 화성 이주 계획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을 몰살시킨다. 그 피바람의 사이에서 꽃님이와 강현우 박사는 겨우 목숨을 건졌고, 마지막 희망이 승리호에 실리게 된다.


                                                                        

가난이 죄인지, 죄를 지어서 가난한 건지


순이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필요한 돈은 19만 달러. 기동대장에서 파면된 후 태호에게 남은 건 비시민권자라는 낙인과 순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뿐이다.


태호는 UTS에서 쫓겨난 후 1년의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낸다. 순이를 잃던 날, 태호는 행성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바닥에 바짝 엎드려 돈을 주우며 돈에 눈이 멀어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고 무섭고 짠했다. 태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돈을 쓸어 담다가 순이가 없어진 걸 알고 울부짖는다. 마지막까지 아빠를 위해 삐뚤빼뚤한 글씨를 써 내려가던 아이에게 아빠는 지폐 한 장을 내려놓으며 나가서 간식이라도 사 먹으라며 짜증을 냈다. 늦게나마 순이를 제대로 보내주기 위해선 궤도 이탈을 하기 전, 순이를 찾아내는 것뿐이다. 주어진 기한은 3년이다. 태호는 우주 청소부가 되어 장선작과 타이거 박, 업동이와 함께 우주 쓰레기를 줍는다. 하지만 매일같이 일해도 쌓이는 건 빚이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런 태호앞에 나타난 꽃님이는 기한이 지나기 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좋은 아빠가 될게


순이를 생각나게 하고, 자꾸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맑은 아이가 태호의 마음을 뒤흔들지만 태호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한다. 하지만 태호는 순이에게 약속했던 좋은 아빠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설리반에게 받은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마지막 결정을 한다. 꽃님이를 되파는 것이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면 그와 반대로 꽃님이를 지키는 건 순이와 한 약속을 지킬 마지막 기회이자, 태호가 설리반 밑에서 저질렀던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나의 낙원’을 만들고 진짜 인류의 구원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잘라내려는 제임스 설리반. 장선장은 설리반에게 대항하며 그의 얼굴에 총구를 댔던 유일한 사람이다. UTS 시민권자로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던 장선장은 그 이후 우주 청소부가 되어 우주를 떠돌게 되었지만, 여전히 왼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정의를 꿈꾸고 있다. 장선장의 반지는 영화의 후반부가 되었을 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준다. 꽃님이를 검은 여우단에 팔아보자는 태호에게 “정의롭지 못하잖아.”라고 말하던 장선장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이도 가장 어린(타이거 박 피셜) 장선장이 승리호의 선장 자리에 앉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승리호의 선원들은 각자가 가진 죄책감을 기반으로 가장 인간적인, 정의로운 선택을 한다.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감정은 ‘죄책감’이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통해 우리는 책임감과 정의감을 배운다.


장선장은 UTS 시민권자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공학 인재로 스카우트된다. 그녀는 교육도중 EMP 지뢰와 레이저건 등 무기를 최초 고안해내는데 성공한다. 19살이 되던 해, UTS에 반감을 품은 장선장은 해적단을 꾸리게 된다. 장선장이 발명한 무기들은 군대의 살상 무기가 되어있었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걸 본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캐릭터로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떠오르기도 했다.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발명한 과학자가 다른 사람의 욕심에 의해 살인 무기를 만든 사람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을 터. 장선장은 과학과 시민권을 내려놓고 우주로 떠난다. 영화의 후반부, 다시 한번 또는 마지막으로 설리반을 처치할 기회가 온다. 장선장은 레이져건을 들며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는 오랜 시간 자신이 만든 무기를 손에 들지 못했을 만큼 많은 죄책감과 후회,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거운 감정들은 새로운 정의감을 낳는다. 장선장의 손에 꼭 맞게 껴진 반지가 그 감정들을 전하고 있는듯하다.


타이거 박은 4년 전, 지구에서 마약 밀매 조직의 수장으로 체포된 후 도주에 성공한다. 그렇게 안착한 곳은 승리호. 업동이는 꽃님이에게 선원들의 과거를 알려주며 타이거박이 마약 밀매로 번 돈을 아이들에게 썼다고 말한다. 지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마약 밀매를 벌였다는 뜻일 텐데.. 타이거 박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갚아나가던 중이었던 걸까? 아니면 아이들을 위해 죄를 저질렀던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승리호의 선원들 중 가장 먼저 꽃님이와 친해진다. ‘우리 꽃님이-’를 위해 노력한 걸론 1등 삼촌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꽃님이도 그런 타이거박을 믿고 따르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타이거 박에게 첫 번째로 보여준다. 타이거박에게 어떤 과거가 더 숨겨져있는진 알 수 없지만, 그가 아이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 자신이 지은 죄를 아이들을 통해 갚아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을듯했다.



태호는 기동대장, 업동이는 군소속의 로봇이었다. 태호는 설리반의 뜻에 반했다가 파면 당하게 되고, 업동이는 수명을 다해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UTS의 쓸모에 의해 움직이던 둘은 쓸모를 다하게 되자 버려진다. 하지만 UTS의 밑에서 일하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업동이와 태호도 장선장, 타이거박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마음먹는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해하는 게 아닌, 지켜야 한다는 정의감을 안고서.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감정을 가진 승리호 선원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해하고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설리반. 설리반은 승리호 선원들의 정 반대편에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운다. 나는 설리반을 통해 푸릇한 생명의 낙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를 보았고, 사람과 가장 먼 공간 또는 죽음으로 여겨지는 우주에서 승리호 선원들을 통해 ‘가장 사람다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다운 사람’. 설리반은 사람이었지만 사람답지 못한 존재였고, 그와는 다르게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 같은 존재도 있다.

그건 바로 ‘업동이’. 업동이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피부이식 수술을 꿈꾸고 있는 로봇이지만, 보다 보면 로봇보다는 사람에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업동이는 다른 선원들과 똑같이 책임감과 애정, 열망을 느낀다. 꽃님이와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화장 놀이를 하며 부끄러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승리호 선원들과 함께 책임감을 갖고 꽃님이를 지킨다. 사실 군의 목적에 따라 살아왔던 업동이가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선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신기하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업동이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업동이는 우주선을 왜 승리호라고 지었냐고 묻는 꽃님이에게 “예전엔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줄 알았어”라고 답한다. 하지만 업동이는 이제 알고 있다. 나 혼자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업동이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누군가의 명령 아래 살아가는 로봇이 아닌, 승리호 선원들과 함께 책임감과 죄책감, 사랑을 느끼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업동이는 사람처럼 보이는 수술에 성공한다. 업동이는 이제 내면과 외면 모두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우주에서는 위도 아래도 없대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소중하다고.


꽃님이가 태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선 위도 아래도, 높고 낮은 자리도 없다고.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큰 걱정 없이 삼촌의 옆에 딱 붙어 재잘대는 어린아이가 던진 이 한마디가 <승리호>라는 영화의 중심 메시지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한 존재를 두고 천하고 고귀한 것을 논할 수 없으며, 높이를 따질 수 없고,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승리호>에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소중하다.”는 말처럼,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 그건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귀에 꽂고 있는 자동번역기다. <승리호>에서는 수많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의견을 표하고, 번역기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흔히 만국 공통어라고 말하는 언어 대신에 각자의 언어를 모두가 평등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만국 공통어라 칭하는 그 언어도 ‘국가의 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승리호>가 보여주는 우주에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유롭게 소통한다. 이 작은 번역기는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인 것이다. 유일하게 꽃님이만이 자동번역기를 사용하지 않는데, 꽃님이는 이미 우주의 모두가 소중하고, 위아래가 없음을 알고 있는 순수한 아이였기에 번역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제임스 설리반은 자신이 받은 충격과 트라우마를 변명처럼 달고, 사람들을 탐욕과 야만에 물든 존재로 취급했으며 자신 또한 혐오와 탐욕에 눈이멀어 엄청난 일을 벌이려고 한다. 누군가는 시민 거주 지역에서 평화롭게 책을 읽고, 공놀이를 할 때 누군가는 우주 밖에서 총알보다 10배 빠른, 낙원에서 떨어져 나온 쓰레기를 주우며 삶을 이어간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승리호가 쓰레기를 잡은 후, 시민 거주 지역 외벽에 살짝 부딪히는 장면이 나온다. 태호와 승리호 선원들은 곧 부딪힌다는 안내 멘트에 크게 당황하며 항로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퉁-하고 외벽에 부딪히는 순간, 거주 지역 안에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늘이 잠깐 출렁였을 뿐이다. 영화 속 두 계층이 겪는 현실은 이렇게나 다르다. 그리고 이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건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과 탐욕이었다.



화성에선 새로운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그게 곧 인류의 희망은 아니었다. 수많은 인류가 발을 붙이고 있는 지구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으니. 진짜 인류의 희망은 승리호와 사람들에게 있었다. 식물을 키워내는 능력을 가진 꽃님이와 탐욕과 야만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이 인류의 희망이었다.


2021년의 지구와 <승리호>가 보여주는 2092년의 우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끝을 알 수 없이 어둡게 보이기도 하지만, 반짝이는 별들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는 우주. <승리호>는 그곳에 우리의 모습을 담아냈다. 조금 더 넓고 높은 모양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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