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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Feb 05. 2021

<한여름의 판타지아>-'눅진한 추억의 숨결을 엮어..'

[영화 후기,리뷰/왓챠, 여름, 로맨스 영화 추천/결말 해석]

                                                                             

한여름의 판타지아

(A Midsummer's Fantasia)

개봉일 : 2015.06.11.

감독 : 장건재

출연 : 김새벽, 이와세 료, 임형국


눅진한 추억의 숨결을 엮어 만든 한여름의 꿈


아지랑이가 쉼 없이 피어오르는 여름,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간 마을 ‘고조’에서 일어난 환상적인 한여름의 꿈 이야기. <한 여름의 판타지아> 다시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눈이 펄펄 날리던 2월의 첫 주, 그냥 갑자기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역시 이 영화는 후끈한 열기가 감도는 여름밤에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 하나를 틀어놓고 봐야 제맛인 영화라는 것을.



영화감독 ‘태훈’이 새 영화를 구상하기 위해 찾아간 일본의 소도시 ‘고조’. 태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로 떠나가고, 노인들과 오래된 기억들만이 남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추억을 그러모은다. 이야기의 배경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던 태훈은 고조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이야기의 갈피를 잡아간다. 어두운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던 날, 그는 사람들의 추억을 조밀하게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태훈이 보고 있는 고조의 모습은 흑백, 태훈이 만들어낸 영화 속 고조의 모습은 여름의 싱그러운 색이 가득하다. 고조에서 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 위에 태훈의 시선이 얹어지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이제는 옛날 물건들만 남아있는 부서진 것과 같은 상태의 마을 ‘고조’에 한여름의 꿈같은 사랑 이야기가 아주 조용하고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위에 여름의 뜨거운 호흡이 얹어진다. 우리는 이 싱그러우면서도 때론 축축한 여름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기만 하면 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시놉시스


영화감독 ‘태훈’은 새 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지방 소도시인 나라현 고조시를 방문한다. 조감독 ‘미정’과 함께 쇠락해가는 마을 곳곳을 누비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답한다. 떠나기 전날 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태훈’은 이제 막 불꽃놀이가 시작된 밤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는데…


“오늘 밤, 불꽃놀이 축제에 같이 갈래요?” 한국에서 혼자 여행 온 ‘혜정’은 역전 안내소에서 아버지의 고향, 고조시에 정착해 감을 재배하며 사는 청년 ‘유스케’를 우연히 만난다. 가이드를 자처한 그와 함께 걸으며 길 위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어느새 해가 지고 별이 뜨는 밤, ‘유스케’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약속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해 여유롭게 지켜봤던 식당의 풍경, 유스케의 첫사랑 이야기, 연고 없는 무덤 이야기, 오래전 고조를 덮쳤던 태풍 이야기, 50년대의 임업, 이젠 텅 비어버린 산기슭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 폐교안에 그대로 맺혀있는 어린아이의 첫사랑 이야기. 태훈은 고조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고조’라는 도시에 얽힌 사람들의 추억을 메모한다. 누군가에겐 일자리를 찾아오게 된 도시, 누군가에겐 떠날 수 없는 운명 같은 도시, 누군가에겐 첫사랑의 기억을 담은 도시, 위로가 되는 도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고조는 여전히 남은 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킨다.



에어컨보다는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는 선풍기 한 대가 생각나는 도시. 영화는 도시의 분위기에 걸맞게 아주 길고 느리게 그곳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도시의 상처와 번영, 얼마 남지 않은 정다움 속에 맺혀있는 외로움과 공허함. 이 모든 감정들이 흑백 화면 속에 담긴다. 그렇게 영화의 절반이 지나간다. 까만 하늘에 보름달이 앉아있던 여름 밤, 태훈은 이상한 꿈에 눈을 뜨게 된다. 밤하늘에 불꽃이 터지고, 태훈의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의 기억은 한곳에 모여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도시에 색채와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그곳엔 배우를 꿈꾸는 혜정과 감을 재배하는 청년 유스케가 등장한다. “미정씨와 닮은 여성분을 안내해드린적이 있어요”라는 공무원 청년 유스케의 한마디로부터 파생된 꿈같은 로맨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했기에 고조가 마음에 든다는 혜정,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무엇이든 보여주고 싶은 유스케. 두 사람은 천천히 고조의 길거리를 걸어간다. 함께 유스케의 유년이 담긴 시노하라에 가고, 같은 주제에 얽힌 추억을 나눈다. 유스케가 읊어주던 시노하라의 최근 역사 속엔 이전에 태훈이 인터뷰했던 고조시 사람들의 추억이 자연스레 녹아들어있다.



함께 길을 걷고, 같은 곳을 바라본 이틀. 유스케는 혜정과 함께하는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유스케는 항상 혜정에게 다가가고 싶어하고 혜정은 그를 밀어내진 않지만 조금씩 물러난다. 노부오씨의 집 마루에 걸터앉은 두 사람의 사이엔 두꺼운 기둥이 위치하고 있다. 유스케는 산 중턱에 위치한 할머니 집을 이야기하며 혜정쪽으로 팔을 뻗지만 혜정은 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유스케는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유스케는 안내소에서 혜정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하게 된다. 혜정에게 호감을 표하고 싶었던 그는 마을을 소개해 주고 혜정과 헤어지기 전 자신의 명함과 감 두 봉지를 건넨다. 혜정은 유스케의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는 듯 그가 건넨 감 두 봉지 중 한 봉지만 건네받는다. 둘의 사이는 가까워질 듯, 멀어질 듯 한결같이 유지된다.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홀로 찾아온 도시에서 새로운 흔들림을 만나다니. 유스케와 혜정 사이엔 미묘한 공기가 흐른다. 그 여름의 숨은 축축하고 뜨거웠지만 둘 사이엔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살랑이는 느낌이다. 혜정이 가끔씩 일본어를 더듬어도, 유스케가 실없는 전설 이야기로 장난을 쳐도, 이야기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것마저도 설렘이고 사랑이었으니.



혜정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유스케는 혜정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혜정은 유스케의 고백에 남자친구가 있다며 거절한다. 유스케는 혜정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한발자국 물러난다. 조금 늦게 만난 인연은 이내 불꽃처럼 밤하늘에 흩어진다. 짧지만 행복했던 꿈같았던 이틀 밤. 길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혜정의 말처럼, 둘이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어쨌든 행복했으니 그걸로 됐다. 갑자기 찾아오고, 또 갑자기 떠나야 하는 사랑이지만 행복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재료를 찾진 못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찾을 수 있었던 여름밤. 모든 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소중한 사람을 만났던 여름밤은 꿈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마지막 날 밤, 유스케의 손목에 적어줬던 연락처도 뜨거운 여름밤 열기에 번져 금세 사라졌겠지.



그 해 여름, 여러 추억들이 모여 만들어낸 환상적인 여름밤의 꿈은 싱그러운 바람이 되어 마음을 간지럽힌다. 아마도 올해 여름이 오면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보지 않을까 싶다. 꼭 습도가 조금 높은 밤에 시원한 음료수를 준비하고 선풍기 하나만 틀어놓은 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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