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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Feb 14. 2021

<2046> - '잊지 못할 것들을 묻은 영원의 도시'

[영화 후기,리뷰/홍콩, 왕가위 감독전 영화 추천/결말 해석]

                                                                              

2046 (2046)

개봉일 : 2004.10.15. / 재개봉 :2021.02.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쯔이, 장첸, 기무라 타쿠야, 유가령, 양조위, 왕페이, 베이 로건, 장만옥


잊지 못할 것들을 묻은 영원의 도시


떠올리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워 외면하려 했던 기억들을 묻어둔 영원한 도시 2046. 나에게 <2046>이라는 영화는 <화양연화>, <아비정전>, <중경삼림>에 이어 4번째로 접하게 된 왕가위 감독의 영화다. 왕가위 감독의 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왕가위 몇 작품들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듯한 포인트들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46>같은 경우엔 <화양연화>와 같은 결이라는데, <화양연화>를 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이번에 쓰게 될 <2046>에 대한 글은 아무래도 <화양연화>와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평면적인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아직 많이 본건 아니지만, 왕가위 감독이 시간을 느리게 감거나, 두 사람을 좁은 골목이나 복도, 작은 공간 안에 세워 눈을 마주치게 만드는 장면을 연출할 때마다 심장이 느리고 무겁게 뛰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의 긴장감과 새빨간 아름다움은 다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특히 난 천천히 흔들리는 인물들의 손을 가장 좋아한다. <2046>에선 수리첸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껏 본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행복한 사랑보단, 불안정하고 곧 깨질 것 같은 사랑을 하거나 관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벼운 사랑을 반복하는 인물들뿐이었다. 사랑을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닌, 진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 같달까. 그래서인지 그 영화들을 보며 한 번도 가볍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고. <2046>은 특히 더 힘들었다. 차우가 이야기하는 소설과 현실 속 시점이 여러 번 바뀌어서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차우와 바이양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2046. 왜 이 영화의 이름은 2046일까. 영화를 다 본 후에야 궁금해졌다. 영화 속 주인공 차우는 2046을 '아무 의미 없는 번호'라고 말하지만, 알고 보니 2046은 홍콩인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숫자가 아닌 홍콩의 역사가 얽혀있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뜻하는 숫자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8년. 홍콩이 영국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영원할지도 모르는 99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그 사이 홍콩은 빠르게 성장해 국제무역 도시가 되었고, 99년이 지난 후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협상이 체결된다.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철수하고, 홍콩 특별 행정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홍콩이 국제 기구에 참여하기 위해선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승인이 있어야 했으며, 홍콩이 아닌 중국을 함께 붙여야 했다. 영국은 협정 당시, 차후 50년(2047년까지) 동안 홍콩의 현상 유지를 조건으로 걸었지만, 중국 공산당은 홍콩을 그대로 두지 않고 있다.


홍콩인들은 시위를 지속하거나,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홍콩을 떠나고 있다. 홍콩이 반환된 지 50년이 되는 해, 2047년. 그 해는 과연 어떤 해가 될 것인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었던 해’로 기록될 것인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솟구친다. 2046은 격동의 해가 될지도 모르는 2047이 오기 전, 파르르 떨고 있는 마지막 숫자다. 왕가위 감독은 이 숫자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싣고 떠나지만 다시 내리는 사람은 없는 열차에 부여한다. 그리고 2046열차에 올라탄 채 끝없이 흔들리는 청춘을 통해 곧 깨질듯한, 온전하지 못한 불안감을 표현한다.



<2046>이라는 영화의 첫 이미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불안정한 꿈’ 같았다고 말하겠다. 2046년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2046 소설을 쓰는 작가 ‘차우’의 나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영원한 장소, 2046으로 향하는 사람들. 쉽게 떠날 수도 쉽게 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에 사랑했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했던 영원의 공간.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완벽할 거라 생각했던 그곳에. 눈물을 부르지 않는 추억만 있는 그곳에. 2046으로 향하는 열차는 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쉼 없이 달린다.


<2046>은 뿌옇고 아릿하고 흐리다. 하지만 그 불명확함이 날카로운 시간들을 부드럽게 깎아내린다. 그래서 조금, 아주 가끔 아름다운 시간들도 있었다. 그에 위안을 삼으며 <2046>을 마지막까지 볼 수 있었다.




2046 시놉시스


'2046년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는 작가 '차우'는 평소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고 많은 여성과 일회적인 만남만 지속한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바이양'과도 육체적인 관계만 즐기지만 '바이양'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중 호텔 사장의 딸 '징웬'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함께 쓰기 시작한 '차우'는 어느새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차우'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투영된 소설의 결말은 무엇일까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모든 게 영원한 2046으로 떠난다.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작가 ‘차우’.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껍질 아래 웅크린 상태로 가벼운 관계를 지속한다. 글로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것들을 써내던 차우는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쾌락을 즐긴다. 그렇게 1966년 크리스마스이브가 되고, 오래전 인연을 맺었던 루루를 만난다.


술에 취한 루루를 데려다준 호텔방. 2046호. 차우는 루루를 다시 찾아가지만 루루는 그 자리에 없었다. 차우는 루루가 머물렀던 2046호에 묵으려고 하지만, 호텔방을 정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2047호를 쓰게 된다. 2046이란 숫자보다 2047이라는 숫자에 더 익숙해질 때쯤, 왕 사장의 딸 징웬과 콜걸 바이양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을 사랑한 첫째 딸과 자유로운 생활을 갈망하던 둘째 딸. 호텔 주인 왕 사장은 집안일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딸들과 갈등이 생길 때면 오페라를 크게 튼다. 호텔은 매일같이 오페라가 울려 퍼진다. 딸 둘이 호텔을 떠날 때까지.



<2046>


사람들은 차우가 왜 미래 얘기를 쓰는지 궁금해한다. 차우는 2046이 그냥 번호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허구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불황 속으로 말려들고 있는 현실과 외로움을 외면하면서.


차우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차우는 오래전 사랑했던 여인 수리첸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직 놓지 못한 수리첸의 기억을 품고 영원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쉼 없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끼면서. 차우의 마음은 그리움과 슬픔이 가득했기에 새로운 사랑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저 스쳐가는, 육체적 관계를 맺는 여자들뿐. 바이양도 그런 여자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차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바이양이 안타깝긴 하지만, 바이양은 그저 소설에 잠깐 등장하는 여자. 그 정도일 뿐이었다.



바이양이 떠나고 입원했던 징웬이 호텔로 돌아온다. 차우는 왕 사장 몰래 징웬의 편지를 받아주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글을 쓰며 옛사랑 수리첸을 떠올린다. 그리고 징웬을 사랑하게 된다. 징웬의 존재는 차우가 진흙으로 묻어두었던 비밀을 다시 파내기 시작한다.


차우가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 일본인 남자 탁은 2046으로 향하는 열차를 탄다. 2046에서 옛사랑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탁은 기대한다. 끝없이 달리는 열차 안, 1224,1225호에 타있는 사람은 탁이 유일했다. 그가 마주치는 존재 또한 한정적이었다. 오랜 시간 열차에서 일한 인조인간 승무원 한 명. 탁은 차갑게 얼어버린 공기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승무원을 끌어안는다. 열차의 승무원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방침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나를 제외하면 그녀뿐인 것을.


                                                                       

내 생활에 간섭마


차우는 바이양과 오랜 시간 육체적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방에 적극적으로 들이지 않는다. 바이양과 처음 인사를 나눌 때도 차우는 불쑥 그녀의 방에 들어갔고, 관계를 나눈 후에는 방에 가야 한다며 함께 밤을 새는 일이 없었다. 바이양은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차우를 보며 불안해하다가 어느 날 밤, 차우의 방에 숨어든다. 차우는 바이양과 관계를 맺고는 긴 밤손님은 받지 않는다며 다음날 아침을 함께 맞이하고 싶다는 바이양의 청을 거절한다. 그와 반대로, 징웬은 차우의 방에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징웬은 마감을 앞둔 차우가 몸이 좋지 않을 때면 침대에 누워있는 차우의 말을 받아 적는다.



2046호와 2047호. 그 사이엔 모든 소리가 다 들릴 만큼 얇은 벽 한 겹만이 서있다. 2047호에 머물고 있는 차우는 그 얇은 벽 틈 사이로 2046호에 있는 징웬에게 온 남자친구의 편지를 밀어 넣는다. 얇지만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그리움의 틈으로 새로운 감정이 빼꼼 고개를 내밀듯, 흰 봉투는 그렇게 징웬에게 닿는다. 하지만 얇은 벽을 통과해 도착한 봉투에 담긴 건 차우의 마음이 아닌 일본인 남자친구의 간절한 애타는 사랑뿐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숨기고픈 비밀이 생기면 나무에 구멍을 뚫어 그 안에 비밀을 말했다. 그리고 구멍에 진흙을 덮어 비밀을 묻어버렸다.


혼란한 세상에서 차우가 자신의 마음을 내놓을 수 있었던 과거의 사랑 수리첸. 그리고 수리첸을 찾아 돌아온 홍콩에서 만난 여인 징웬. 차우는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이루어지지 못할 현재의 사랑에 슬퍼한다.


2046의 주인공인 일본인 남자 ‘탁’. 그는 2046으로 향하는 열차를 탄다. 그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혼자 남은 열차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다 열차의 승무원과 사랑에 빠져 괴로워한다.


차우는 탁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소설을 써 내려간다. 탁은 차우 그 자체다.



소설 속에서 말하는 영원한 곳 2046의 의미는 ‘홍콩’이다. 소설의 주인공 탁은 옛사랑을 찾아 2046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고, 차우는 옛사랑을 찾아 홍콩으로 돌아온다. 소설 속, 사랑해선 안될 승무원은 차우가 아닌 일본인 남자친구를 사랑했던 징웬이다. 차우에게 홍콩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의 감정을 묻은 곳이자 그와 동시에 어쩌면 옛사랑을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묻힌 곳,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만나 새로운 슬픔을 느낀 곳이다.


차우가 싱가포르로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 완고하게 거절했던 수리첸. 마지막 키스를 나눈 밤과 함께 비밀로 남겨진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 나무에 구멍을 파묻듯, 비밀로 묻어버렸던 사랑의 감정이 징웬을 통해 다시 떠오르지만 차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차우는 징웬을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사랑해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차우는 징웬과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2047’을 징웬에게 선물한다. 소설을 읽은 징웬은 재밌지만 너무 슬픈 결말이라며 결말을 바꿀 순 없냐고 말한다. 차우는 소설의 결말을 고쳐보기 위해 책상에 앉는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새로운 결말을 써내지 못한다. 징웬을 향한 차우의 사랑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기에, “다른 곳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하고 괜한 후회와 기대를 해봐도, 이 사랑의 엔딩이 바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언젠가 과거에서 벗어나면 날 찾아와.


과거, 수리첸과 차우가 이야기를 나누던 날 밤. 차우는 수리첸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준다. 과거에 사랑했던 유부녀의 이름도 수리첸이었다면서. 수리첸은 차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차우에게 수리첸의 과거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차우는 수리첸에게 말한다. “언젠가 과거에서 벗어나면 날 찾아와”라고 말이다. 그건 수리첸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수리첸을 사랑했던 남자는 또 다른 수리첸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다음엔 수리첸을 닮은 여인 징웬을 사랑한다. 그는 아직도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2046행 열차에 타있다.


                                                                        

사랑에 있어 대신은 없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는 옛사랑과 비슷한 여인을 보고 다시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작된 불안정한 사랑은 여전히 외롭고, 흔들릴 뿐이다. 잊지 못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올라탄 기차는 그저 끝없이 달릴 뿐이다. 종착지에 그토록 원하던 사랑이 있을지 없을진 알 수 없지만 그저 달린다.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며 빠져들었던 현재의 사랑.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실되게 표현할 수 없었던, 비밀로 남겨야만 했던 사랑. 과거에 대한 미련과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는 그리움. 차우는 이 모든 것을 안고, 아릿하고 흐린 기억의 밤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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