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경 Mar 03. 2021

<열혈남아> - '빛나기 위해 태워낸 청춘의 모든 것'

[영화 후기,리뷰/왓챠, 넷플릭스, 홍콩, 왕가위 감독 영화 추천/결말]

                                                                              

열혈남아 (旺角卡門, As Tears Go By)

개봉일 : 1989.10.04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만지량

                                                                       

빛나기 위해 태워낸 청춘의 모든 것


단 10초라도 좋으니 빛날 수 있다면 어떤 무모한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동생 창파와 문득 찾아온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 아화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자 소화의 거칠고 불안정한 청춘의 한순간을 담은 영화 <열혈남아>. 왕가위 감독의 시작점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는 스탭 프린팅 기법(저속촬영 후 특정 부분을 복사해 붙이는 기법)을 활용하여 인물들의 움직임을 더욱 환상적이고 세밀하게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열혈남아>를 보면서 놀랐던 건, 크게 두 부분이었다. 첫번째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카메라 워킹이었고, 두 번째는 주연 소화를 연기한 유덕화, 아화를 연기한 장만옥의 패션이 전혀 촌스럽지 않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최근에 레트로가 다시 유행한 이유도 있겠지만 유덕화의 가죽 재킷과 청바지, 선글라스 패션은 정말.. 박수가 짝짝짝- 나올 정도다. 사실 거친 홍콩 누아르물은 내 취향에 찰떡같이 맞는 장르는 아니지만, 유덕화의 젊은 시절 모습에 홀리는 바람에..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 영화는 <열혈남아>라는 제목에 걸맞게 정말 뜨겁다 못해 따갑게 느껴지는 남자들의 의리가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홍콩의 어느 뒷골목 이야기다. 뒷골목에서 꽤나 힘을 쓴다는 조폭 소화와 그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아화. 그리고 명예를 쫓는 무모한 동생 창파. 돈도 없고, 멋진 직업도 없지만 의리만큼은 넘치게 갖고 있는 남자의 쓴맛 나는 인생에 드디어 평범하고 행복한 순간 한 조각이 끼어드나 싶었는데, 그 사랑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열혈남아>속 주인공들이 말하는 그 명예와 멋이 무엇이기에,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힘든 것일까. 답답함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열혈남아 시놉시스


대만에서 살고 있던 아화는 홍콩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뒷골목 건달 소화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된다. 어색한 동거가 이어지던 가운데, 소화와 아화는 점점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의형제이자 뒷골목 양아치로 사고만 치고 다니는 창파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매번 다쳐서 돌아오는 소화를 견딜 수 없었던 아화는 그를 떠나게 된다. 홀로 남겨진 소화는 형으로서 창파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랑하는 아화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소화는 숙모의 부탁을 받고 친한 분의 딸이라는 아화를 집에 들이게 된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에 잠을 설친 소화는 아화를 거실에 앉혀두고 다시 잠에든다. 아화는 해가져도 일어나지 않는 집주인을 대신해 바쁘게 울리는 전화를 받고, 천천히 집을 둘러본다. 쓰레기와 접시가 뒤섞여 난장판이 된 주방엔 제대로 정렬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밥을 해먹고, 쉬기 위해 집에서 머문다기보단 소화의 집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거 오렌지 많이 먹으면 괜찮아져.”


폐가 비정상적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아화에게 소화는 이렇게 말한다. “그거 오렌지 많이 먹으면 괜찮아져.”라고. 무심하고 성의 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한마디지만 소화는 나름대로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 것이다. 소화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조폭이다. 언제 싸움에 휘말릴지 모르고,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그는 많은 걸 소유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또 다른 약점이 될 것이다. 만일 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들을 책임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소화는 메이블을 6년이란 시간 동안 만나왔지만, 메이블은 불안정한 소화의 생활을 감당하지 못했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비밀로 한 채 낙태를 감행한다. 소화는 말없이 낙태 시술을 한 메이블에게 분노했고, 메이블은 그런 소화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소화는 화를 낼뿐, 메이블에게 변명하거나 새롭게 다짐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슬픔과 분노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소화는 집을 휩쓸며 분노를 표현한다. 여느 때 같으면 미친 듯이 분노를 폭발시켜도 말리는 사람 한 명 없었을 공간인데 이제는 다르다. 지금 소화의 집엔 아화가 함께 있다. 아화의 등장과 동시에 소화와 소화의 집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물을 따라 마실 컵 하나도 없었던 소화의 집에 새로운 컵이 생기고, 밥 짓는 냄새가 퍼진다. 소화는 아화를 향해 함께 영화라도 보러 가자며 자신의 마음을 슬쩍 표현하고, 아화도 그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화를 둘러싼 것들이 둘의 사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소화는 아화에게 피 묻은 옷을 보이고 싶지않아 급하게 화장실 불을 끄지만 아화가 그의 현실을 모를 리가 없다. 잠시 설렘을 느끼던 아화는 소화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난 너에게 어떤 약속도 해줄 수 없어!


아화는 소화를 위해 컵을 준비한다. 컵이 모두 깨지고 새로운 컵이 필요해졌을 때 마지막 컵의 장소를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고향으로 돌아간 아화는 한가한 식당에 앉아 소화를 생각한다. 소화는 조폭의 삶으로 인해 사랑했던 연인 메이블과 아화를 잃는다. 틈 하나라도 허용하지 않을 듯 비가 쏟아지던 날, 전 연인 메이블을 다시 마주친 소화는 동그랗게 불러온 메이블의 배를 바라본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의 아이를 가진 메이블. 사랑했으나 내일을 약속할 수 없어 헤어져야 했던 전 연인 메이블. 그녀의 모습을 본 소화는 마지막 컵을 가방에 넣고 아화를 찾아간다. 지금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지만, 언젠가 약속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화를 놓치면 또 후회하지 않을까? 둘의 사랑은 불안정한 현실의 공기 따위로는 막을 수 없는 파란 불꽃처럼 타오른다.



소화는 동생 창파라도 빨리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며 어묵 좌판을 차려준다. 하지만 창파는 여전히 “돈보다 명예가 중요한 거야”라며 어묵 장사를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소화는 최대한 싸움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창파는 소화처럼 명예를 누리고 싶다는 마음에 선을 넘는 객기를 부린다.



난 뭘 하든 그다음은 생각 안 해.


소화는 자신의 삶을 ‘내일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삶’이라고 말한다.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명예를 좇는 동생 창파를 걱정했고, 무엇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화는 아화를 만나고 처음으로 내일을, 다음 여행을 기약하게 된다. 그는 오늘이 아닌 다른 날, 다음 여행을 갈 때 함께 가자고 약속한다,



소화와 아화에게 온전한 모양의 사랑이 싹트고 있을 무렵, 창파는 모든 위험을 등에 지고 자신이 우습지 않은 놈이란 걸 증명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지키고 싶은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는 창파에게 남은 건 남자의 명예뿐이었으니 더 이상 눈치 볼 것이 없다. 창파는 경찰서 주차장에 숨어들어 총을 난사했고, 소화는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창파를 향해 뛰어든다.


소화는 창파와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그를 이토록 지키고 싶어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음 여행을 함께 가자고 약속 해놓고, 네가 가면 나도 간다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들다니.. 사랑보다 더 진한 의리라는 것은 어느 틈에, 어떤 일로 인해 만들어진 걸까. 뒷골목을 점령했던 남자들이 그토록 외쳤던 ‘남자들의 의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진 잘 모르겠다. 그저 결국 지키지 못한 사랑의 약속이, 피지 못하고 사라진 두 사람의 내일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릴 적에 가졌던 ‘홍콩 누아르’에 대한 환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였다. 강렬하면서도 희끗한 형상의 네온사인, 어두운 골목, 빠르게 말려드는 사랑. 하지만 그 환상이 조금은 깨졌는지 완전히 아름답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입안에 씁쓸하고 떫은맛이 맴돈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매거진의 이전글 <자매들의 밤>- '세월에 굳어진 딱지를 긁어내던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