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여성, 한국 독립영화 추천/결말 해석]
감독 : 김보람
출연 : 강애심, 오지영, 이선주, 남미정, 이경성
세월에 굳어진 딱지를 긁어내던 밤
내 귓가를 스쳐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듣지 못했던 말들이 있다. 그것들은 바쁜 현실을 잠시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 때, 찌릿하게 귀와 마음을 쑤셔놓곤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치여 동생들의 말을 듣지 못한 맏언니, 언니의 마음을 알기에 더 크게 소리치지 못했던 막냇동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던 둘째, 셋째, 넷째 언니들. 오랜만에 다섯 자매가 한자리에 모인 어느 여름날, 자매들은 세월에 단단하게 굳어진 딱지를 조심히 긁어내본다.
<자매들의 밤>은 또 다른 여성 영화 <피의 연대기>로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시선상을 수상했던 김보람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이다. 쉽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이 엇갈리는 사이에 긴 시간이 쌓여가고, 자매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서로의 마음을 마주한다. 이 이야기는 힘이 부쳐 귀를 닫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이자 거친 세상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자매들의 밤>은 20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단편 영화로서 ‘혜정의 집’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룻밤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혜정의 집이라는 배경과 다섯 자매들의 대화뿐이다. 이렇게 적어두니 허전하거나,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했다. <자매들의 밤>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감정으로 굉장한 파고를 만들어내는, 충분히 훌륭한 영화였다.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다섯 명의 자매들이 첫째 혜정의 집에 모인다. 혜정은 오빠의 칠순을 맞아 해외여행 선물을 계획하고 막내 정희는 오랫동안 숨겨 왔던 비밀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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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일과 배다른 오빠의 칠순 기념 선물을 정하기 위해 모인 첫째 혜정의 집. 혜정은 가장 먼저 도착한 막내 정희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누가 너를 가난한 시골 깡촌 막내딸이라고 생각하겠어-” 혜정은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경제적인 자립을 돕기 위해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와 일을 했다. 열심히 일해서 막내 정희를 4년제 대학에 보냈고, 동생들이 결혼할 때마다 경제적인 도움을 보탰다. 그 사이에 배다른 오빠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 동생들에게 비밀로 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회에서 살아남았다.
지숙, 미희, 영이, 정희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이제 자매들은 모두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자매들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어린 정희를 시골집에 남겨두고 네 언니들이 서울로 상경한지 대략 20년쯤 지났을까? 정희는 이제야 긴 소매를 가진 옷들 아래로 숨기기 급급했던 상처를 꺼내 보인다.
혜정은 한여름임에도 긴팔, 긴 바지, 거기에 스타킹까지 신은 정희에게 한여름이니 스타킹은 그만 신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지만, 정희는 혜정의 말에 정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혜정은 정희의 구멍 난 스타킹을 정희의 의견을 묻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정희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스타킹을 보며 한숨을 쉰다. 오빠의 칠순 선물을 준비하지 말자는 지숙의 말에 영이는 “큰언니 말인데 어떡해”라고 답하고, 지숙은 “다들 큰언니 말은 잘 들어요”라며 한숨을 쉰다. 동생들은 큰언니 혜정이 해야 한다고 하면 대부분 군말 없이 따르는 분위기다. 지난 시간 동안 자매의 의사소통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혜정은 겁에 질린 정희가 무서우니 데리러 와달라고 말했던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홀로 서울로 상경한 혜정은 밀려드는 현실만으로도 벅찼을 테니, 시골집에 있는 동생이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생각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언니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고 기댈 사람도, 갈 곳도 없어진 정희는 배다른 오빠의 밑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언니들 또한 자신을 돌볼 여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자신의 상처를 조용히 속으로 삭힌다.
나도 이제 싫은 건 싫다고 말하려고
항상 착하게 행동했던 막내 정희가 혜정에게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낸다. 혜정은 지금껏 아무 말 없었던 동생이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상황이 황당하기만 하다. 게다가 동생들의 결혼에 돈을 보태준 오빠의 칠순 선물을 반대하다니. 그녀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혜정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며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치고, 정희의 사정을 알고 있던 언니들은 “우리가 정희를 못지켰다”며 혜정을 말린다.
온갖 감정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자매들은 조금은 어색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각자의 자리에서 잠을 청한다. 혜정은 자리에 누웠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계속해서 귀에 맴도는 날카로운 소리들은 혜정을 쉼 없이 찔러대고, 잠들지 못하고 있던 혜정의 소리를 들은 동생들이 하나 둘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몇 시인지도 모를 한밤중, 자매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혜정의 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서 얼마나 묵었을지 모를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환하게 빛나며 공중으로 퍼지는 그것들을 보며 자매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혜정은 건너편에 마주 누운 정희의 눈을 바라보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소중한 이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를 짓누르는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와 같은 이유들로 우리는 꽤나 많은 걸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매들의 밤>의 주인공 자매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 아주 오랜만에 한집에 모인다. 자매들은 아마도 부모님의 기일 같은 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가정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을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 보면 아무리 각별한 사이인 ‘가족’이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긴커녕 더욱 단단하고 무겁게 자라난다. 정희는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치료와 심리 상담을 병행하고, 용기를 내 언니들에게 숨겨온 비밀을 말하고, 혜정의 집에 모인 날 마지막으로 맏언니 혜정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가장 큰 책임감을 갖고 있는 언니이기에 정희 또한 혜정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자매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 혜정의 귀에 맺힌 시간들을 보고, 듣게 되고, 혜정은 자신의 귀와 마음을 막고 있었던 시간들에서 해방된다. 자매들은 그날 밤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밤새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을까? 오래도록 혜정을 괴롭힌 책임감과 미안함, 정희를 괴롭힌 괴로움이 아주 작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순간, 단단히 뭉쳐있던 나의 마음도 한순간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