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일럿> 리뷰, 후기 / 한국 블랙코미디 영화
개봉일 : 2024.07.31.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블랙 코미디, 드라마, 코미디
러닝타임 : 111분
감독 : 김한결
출연 : 조정석, 이주명, 한선화, 신승호, 김지현, 오민애, 서재희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엔딩크레딧 시작할 때 1개
<파일럿>은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영화’다. 진지하게 바라보면 엉뚱한 걸 넘어 얼렁뚱땅한 모양새고 영화의 중심 메시지는 보일 듯하다가 다른 것에 섞여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거 여름 성수기에 한바탕 제대로 해먹겠는데?’라는 것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가볍고 유쾌하다.
영화의 주인공 한정우는 비행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최고의 파일럿이다. 그는 나름의 목표를 갖고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불편함을 신경 쓰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정우의 실수는 활활 불타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순식간에 여기저기 퍼진다. ‘나락’. 나락 밖에는 설명할 만한 단어가 없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 정우는 살아남기 위해 여동생 정미의 신분으로 변신해 부기장으로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런데 신분, 성별을 모두 바꾸고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해보니 지금까진 느껴본 적 없는 여러 문제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양자택일의 순간. 정우는 그 선택 앞에서 지금껏 추구해온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이없게 타율 높은 개그와 맞춤 옷을 입은 배우들
개인적으로 좋은 개그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얘기하는 사람만 재밌는 건 좋은 개그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파일럿>은 나에게 적당히 좋은 개그물이었다.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묘하게 현실과 겹쳐져서 나도 모르게 웃게 되는 그런 개그였달까.
그리고 어이없는 문제를 향해 당당하게 변화구를 날리는 정우, 어벙한 나쁜놈 같으면서도 웃음 타율 높은 입담을 보여주는 현석, 찐 남매 케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정미.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리얼한 엄마 안자까지. 캐릭터들 사이 케미가 상당히 좋을 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마치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다.
특히 조정석 배우는 스크린 위를 날아다닌다. 그는 영화를 위해 희생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여러 변신 과정을 유쾌하게 통과하고 남, 여 캐릭터를 넘나드는 연기를 이질감 없이 소화해 내며 영화의 멱살을 단단히 쥐고 달려간다. 그리고 그의 옆을 꿰차고 선 한선화, 신승호 배우는 기대 이상의 매력과 날렵함을 보여준다. <파일럿>이라는 영화엔 호불호가 있을지 몰라도 배우의 연기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주제에 대한 호불호
특정 성별 까기라기보단 모두 까기
잘나가던 남자 기장이 여자로 변신해 항공사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는 줄거리만 봐도 감이 오겠지만 <파일럿>엔 젠더 이슈와 경직적인 기업 문화에 대한 풍자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대놓고 블랙코미디라고 할 정도로 무게감이 있진 않다.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볍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그에 대처하는 방법들이 유머러스하게 표현돼서 크게 불쾌함이 드는 부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영화가 이 문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드냐 들지 않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지 않을까 싶다. 신랄한 블랙코미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너무 가벼워 실망할 수도 있고 특정 성별에 대한 표현,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다소 단순하거나 극단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 ‘특정 성별 캐릭터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라고 말한다면 그 의견 또한 존중한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파일럿>은 박력 있고 깊게 특정 성별을 까내리는 영화가 아닌 대중성, 공감성에 더 초점을 맞춘 조심스러운 모두 까기 영화였다. 이 영화에선 남, 여 가릴 것 없이 모두 문제가 있다. 여성 동료 희롱을 일삼는 현석, 노상무(한국항공). 거기에 휘말린 정우. 말 한마디를 크게 키워 정우를 나락으로 보낸 사람들, 페미니즘을 악용하는 최종 보스 노이사(한에어). 영화는 성별 상관없이 젠더 이슈에 너무 무지하거나 너무 예민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열심히 등짝 스매싱을 날린다. 정우의 찰진 혓바닥을 빌려서 말이다.
젠더 이슈 풍자 외에도 정우의 가족관계와 꿈이 함께 엮이면서 후반부엔 메시지의 방향성이 다소 흐려지긴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이 문제에 대해 모두 까기를 시도한 한국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파일럿>은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종대를 다시 잡은 한정우
<파일럿>에서 젠더 이슈 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정우의 꿈과 관계다. 논란이 터지기 전 정우는 메인 조종대를 잡고 정해진 항로를 달리던 사람이었다. 정우는 돈과 명예를 위해 열심히 달렸고 그 결과 두 가지를 모두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가족과의 관계, 원래 정우가 가졌던 꿈을 잃는다.
추락하기 전, 정우는 높은 곳에 서서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조종사가 무슨 라인이 있냐? 어디서든 비행만 잘하면 돼.”
그런데 정미의 이름을 빌려 다른 비행기를 몰아 보니 비행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열심히 살길을 찾아 비위를 맞추고 함께 비행하는 선배의 개소리를 들어야 하고 대형 인명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끼어들지 말라며 소박 당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떻게 갖고 있던 능력과 본능에 가까운 사명감으로 위기를 넘긴 정우는 다시 새로운 항로에 오른다. 그는 정미의 이름으로 광고, 화보를 섭렵하며 바쁜 하루를 보낸다. 정우는 다시 능력도 생겼겠다 지금껏 챙기지 못한 것들을 챙겨보겠다며 아들 시후에게 발레 용품을 사서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능력, 명예, 가족 관계가 회복됐으니 이제 상황이 좀 안정됐나? 싶은 순간. 슬기가 정우에게 묻는다. 왜 파일럿이 되었는지, 다른 일로 돈을 벌면 비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 정우는 홀로 남매를 키워온 어머니와 소중한 동생 정미를 위해 파일럿이 됐는데 이젠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며 처음으로 속을 털어놓는다.
정우는 계속 자신의 마음을 숨겨왔다. 처음엔 ‘스타 기장’이라는 타이틀로 논란 후엔 정미의 이름, 화장과 가발로. 그는 논란과 변신을 겪으며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스타 기장 한정우에게 비행은 달달한 돈과 명예를 벌어다 주는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한정미가 된 후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비행 한 번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슬기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비상 착륙 사건까지 겪어보니 이제야 그 일에 얹어진 사명감과 가치가 눈에 보인다.
그래서 정우는 벌어야만 했던 돈과 명예가 아닌 내가 순수하게 원했던 비행 그 자체를 선택한다. 그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얹어놨던 가발과 속옷, 구두를 벗어던지며 한정우로 돌아온다. 바람을 조금만 맞아도 찌지직 소리를 냈던 불안한 가발, 무겁고 아슬아슬했던 속옷과 가짜 가슴, 불편했던 구두를 모두 던져버린 그는 날렵한 몸놀림을 뽐내며 도시를 질주한다. 그리고 꼭 해야 했던 솔직한 사과를 전한다. 그가 가발을 벗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스타 기장도 메이저 항공사의 기장도 할 수 없음이 확정되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시원하고 개운한 순간이었다.
정우는 시간이 흐른 후, 해외에서 작은 경비행기를 운전하게 된다. 메이저 비행사도 아니고 이전에 비하면 돈도 많이 벌지 못하겠지만 자신이 원했던 비행이라는 목표. 그 목표를 깔끔히 이룬 정우의 표정은 예전보다 한결 즐겁고 편안해 보인다.
얼렁뚱땅 넘어가는 그 틈마다 웃음이 알차게 들어차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다. 하지만 용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만큼은 큰 응원을 보내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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