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말 먼 곳> 리뷰, 후기, 해석 / 한국 독립 영화 홍경 배우
개봉일 : 2021.03.18.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15분
감독 : 박근영
출연 : 강길우, 홍경, 이상희, 기주봉, 기도영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직면하고 이겨낼 용기가 없을 때 이젠 무엇도 탓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
너무 지쳐 힘을 짜낼 의지조차 없어져 버린 사람은 자연히 싸움이 아닌 도망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그게 제일 덜 힘든 일이니까.
영화 <정말 먼 곳>은 아무도 모르는 먼 곳에서 겨우 혼자만의 안식처를 찾은 주인공 진우의 이야기다.
진우는 어린 딸 설이와 함께 화천에 위치한 양떼목장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우리는 진우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설이의 엄마와는 어떻게 이별했는지, 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목장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진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진 몰라도 일단 편안하고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며칠 후, 진우의 조용한 일상을 바꿔놓을 손님 현민과 은영이 도착하고 진우는 행복과 불안 사이를 오가기 시작한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온 정말 먼 이곳에서 애써 지켜온 작은 행복. 진우는 이 작은 행복조차 욕심이라고, 비정상적인 거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화는 진우, 현민, 은영이 머물고 있는 작은 세상을 관망한다. 그 안에서 진우, 현민은 여전히 정말 먼 곳을 갈망하고, 이제야 목적지를 찾은 은영은 어떻게든 그것을 움켜쥐려 노력한다. 하지만 나만의 유토피아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고 극중 인물들의 아픔은 깎을 시기가 지난 양털처럼 겹겹이 쌓이다 못해 무겁게 뭉쳐진 상태로 마음을 짓누른다.
건조하지만 아름다운 화천 산골의 풍경, 은은하게 다가오는 사랑고백 같은 대사들, 지금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배우들. <정말 먼 곳>은 확실한 이미지와 울림을 가진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글자 너머 세상에 대해 상상하게 만드는 시처럼 영화의 소재인 사랑에 대한 고찰을 넘어 막연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극중 인물들과 내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든다. 빈틈을 채우는 정적과 한숨.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마음은, 그걸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무너진 진우의 정말 먼 곳
주인공 진우는 대부분의 사람이 말하는 고정관념이 깨진 한적하고 정말 먼 곳에서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과거를 갖고 있다. (설이는 아빠 역할을 하고 있는 진우에게 엄마라고 부른다. 어린 진우 또한 아빠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우는 현민이 화천에 온 후로 진우와 함께 새로운 관념의 가정을 구성한다. 두 사람은 설이의 양손을 잡고 걸으며 나름 안정적인 가족의 구조를 만들어간다. 영화는 그늘과 뒷모습, 어둠을 활용해 세 사람의 모습을 어색함 없는 한 가족처럼 담아낸다.
진우는 이 작은 세상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현민은 그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사람이 적은 이 화천 시골마을에선 누군가의 눈길도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진우, 설, 현민으로 이뤄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데 뒤이어 외지인이자 설이의 진짜 엄마 은영이 나타난 이후 이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은영이 처음 목장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편한 옷을 입은 목장 식구들 사이에서 겉옷도 벗지 못한 채 식사를 하거나 여러 추억이 담긴 사진들 끝에 혼자 앉아있거나, 함께 서있는 진우, 설, 현민과 동떨어진 위치에 서있는 등 가족이 아닌 외지인 취급을 받지만 ‘천천히 보면서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는 할머니의 말을 따라 설이의 주변에서 천천히 기다리며 농장 풍경에 스며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 은영은 “내 딸이야.”라는 말과 함께 진우의 세상 한가운데 끼어든다. 이때 화면 속 인물 순서는 현민, 은영, 설, 진우로 구성된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던 진우의 정말 먼 곳, 안정적인 세상은 이 말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진우, 현민, 은영의 관계
새끼를 오래 품고 있던 양처럼 희망을 오래 품고 있던 진우
<정말 먼 곳>이라는 하나의 영화 속엔 세 가지 작은 세상이 담겨있다. 도망치면서 행복을 붙잡으려는 진우의 세상, 이미 충분히 현실을 받아들인 현민의 세상, 뒤늦게 현실을 찾아가려는 은영의 세상. 이 각자 다른 세상들은 하나의 문단이 되어 영화를 완성한다.
진우는 도피자다. 그는 고정관념과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를 떠나 정말 먼 곳인 화천으로 도망친 사람이다. 화천까지 찾아온 현민이 설이를 핑계 삼아 외부와의 소통(설이의 유치원)을 제안했을 때, 진우는 학교 다니던 걸 생각하면 끔찍하다, 설이를 자연에서 배우게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진우는 현실을 받아들일 힘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설이와 편안함, 현민을 붙잡고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또 다른 행복과 안정감을 추구한다. 확실한 행복인 설이에겐 "설아, 멀리 가지 마.”라고 말하고 불안한 행복인 현민에게 "우리, 어디 멀리 갈까?”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진우의 행동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고, 현민과 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진우는 다툼에 지친 현민이 떠난 후에야 알게 된다. 도망과 웅크림을 선택한 순간 가까이 있던 현실이 무너졌다는 것을. 그가 바라는 완벽한 세상, 완벽한 정말 먼 곳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농장주 중만은 새끼를 오래 품고 있는 임신한 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새끼 밖에 내놓기 무섭지? 그렇다고 너무 오래 품고 있어도 안돼.”
진우처럼 먼 곳에 대한 소망을 무조건 오래 품고 있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현민과의 사랑, 설이와의 관계, 평범한 시선. 모든 걸 갖고자 하는 건 소망이 아닌 욕심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의 붕괴를 알아챈 현민
현민은 진우와 다르게 단단한 고정관념을 깨는 사람이자 정말 먼 곳보단 지금 딛고 선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시를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고정관념을 깨는 일인 것 같아요.”
“이렇게 목적어와 서술어 사이에 존재하는 고정관념들을 하나하나 깨보는 거예요.”
시인인 현민은 시를 쓰는 방법으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시를 쓰던 태도 그대로 인생을 바라본다. 고정관념을 깨도 괜찮다, 고정관념에 너무 개의치 않아야 한다. 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현민은 화천 산골에 숨은 진우를 찾아오고 먼저 품을 내어주며 진우와의 관계에 적극성을 보인다. 다만 좀 안타까웠던 건 현민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초연하게 받아들인다기보단 반쯤은 포기한 듯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진우에 비하면 현민은 도망치기보단 맞서거나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현민이 진우보다 단단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고정관념을 깨는 직업을 가진 사람, 쓰고픈 말은 그냥 쓴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어서도 있겠지만 그다음 이유로는 진우와 다르게 현재를 받아들인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진우는 현민을 만난 후에도 먼 곳에 대해 언급한다. 먼 곳을 찾아왔다든가, 아주 먼 곳으로 갈 거라든가 멀리 가지 않겠냐고 묻는 식으로. 현민은 진우의 말에 어디 가, 우리? 멀리?라고 되묻고 진우의 뒤를 따를 뿐이다.
진우는 아무도 없는 먼 섬에서나 안정감을 느끼고 지금과 같은 행복 또는 더 많은 것을 가진 미래를 원한다. 현민은 진우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장례식장 사건 이후 현실을 다시 깨닫고 진우의 바람이 욕심이라고 말한다. (차에서 싸우는 장면에서 언급)
휑해진 강의실에서 현민은 자신의 시를 발표한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현민은 도망친 곳에 유토피아가 있을 확률은 없다는 것을. 그것을 쫓다 보면 가까운 곳, 현실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진우와 현민의 중간 지점, 은영
은영은 현민, 진우의 세상, 그 중간에 위치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싱글맘이 되어버린 은영은 홀로 돈을 많이 벌어 더 좋은 상황이 되었을 때 설이를 찾으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진우에게 설이를 맡겼다.
은영이 설이를 처음으로 본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현민은 설이에게 은영과 진우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데 이때 현민은 은영과 진우를 이란성 쌍둥이로 빗대어 표현한다. 단순히 설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한 단어일 수도 있지만 나는 현민의 말을 들으며 은영과 진우의 세상이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태어났지만 다른 생김새를 가진 이란성 쌍둥이처럼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도망이라는 같은 선택의 결과로부터 시작됐지만 다른 생김새로 자라난다. 진우는 조용하고 더 좋은 곳을 찾아 스스로와 설이를 고립시키는 것을 선택한 후 쭉 그곳에 살아왔고 은영은 도망을 선택한 도피자였지만 5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제 책임질 수 있으니까 다 바로잡으러 온 거야.”라고 말하며 설이를 찾으러 온다. 진우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고 은영은 가까운 곳, 현실을 찾기 위해 돌아온다.
내게 은영은 5년이란 시간 동안 아이를 키울 여유로운 재력과 시간을 준비한 사람이라기보단 그저 여유롭고 유복한 설이와의 미래라는 막연한 소망이 아닌 평범하지만 함께하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엄마처럼 보였다.
그녀는 주로 평범, 정상, 바로잡겠다는 말을 쓰며 평범한 현재를 되찾기 위해 치열하게 진우, 현민, 설이의 주위를 맴돈다. 은영은 유토피아를 꿈꾸던 진우의 세상에 갑작스레 침입한 현실이다.
무거운 양털을 깎아낼 필요가 있듯이 가끔은 무거운 소망도 깎아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양, 양털의 의미, 결말 해석
영화는 두터운 양털과 그 양털을 깎고 있는 진우의 모습으로 시작되고 엄마 배에 오래 머물고 있던 새끼 양이 태어나며 끝난다. 이는 진우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암시 또는 바람을 담은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양털은 양이 체온을 유지하여 양의 생존에 도움을 주지만 오래 깎지 않고 방치하게 되면 그 무게가 몸에 무리를 주거나 시각, 후각을 불편하게 만들어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양털을 깎는 건 양을 위해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
진우에겐 정말 먼 곳을 향한 소망이 이 양털과 같은 의미다. 도망치면 더 좋은 곳이 있을 거라는, 도망치면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과 잠깐의 안정감은 진우를 버티게 해줬지만 결국 진우, 현민, 설이의 관계를 망치고 만다.
진우는 양의 무거운 털은 잘 깎아줬지만 자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헛된 소망을 스스로 깎아내지 못했다. 진우는 적당한 타협이나 포기 대신 ‘먼 곳으로 가자’는 말을 버릇처럼 하며 의미 없는 소망을 이어간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설이를 놓아주지도 못한다. 새끼를 낳을 때가 지났는데 아직 낳지 못하고 있던 그 양처럼 말이다. 장례식장 사건과 다툼을 겪고 현민이 떠난 후에야 진우는 설이를 보내주고 농장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농장을 떠나 더 먼 곳으로 갈지, 사랑하는 현민을 찾으러 갈지는 정확히 답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진우는 안주하고 있던 세상을 떠나기로 한다.
설이가 서울로 가기로 한 날, 오래 새끼를 품고 있던 양이 출산을 하고 진우는 그것을 지켜본다. 새끼 양이 내딛는 알 수 없는 세상으로의 첫걸음. 진우가 그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이 작은 생명체를 보며 용기를 얻었길 바란다.
진우가 너무 먼 소망 대신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이를 찾고 바깥세상의 소란함에 적응하며 근근이 살아갈 수 있으면 한다. 어디든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으니 더는 헤매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우도 나도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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