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란> 리뷰,후기,해석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넷플릭스 신작
- 영화 소개, 줄거리
- 타고난 운명과 계급의 벽을 부수는 천영과 종려. 그들이 부순 회초리의 의미
- 붉은 천과 흉터의 의미
- 종려의 칼, 어사검의 의미
- 엔딩크레딧, 영화 엔딩 결말 해석
개봉일 : 2024.10.11. (NETFLIX)
관람등급 : 청소년관람불가
장르 : 액션, 사극
러닝타임 : 126분
감독: 김상만
출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독립 영화를 중심으로 개막작을 선정하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OTT 영화. 그것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OTT 영화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0월 2일 영화제의 개막을 앞두고 진행된 기자회견에선 'OTT 영화인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과 응답이 연속적으로 오갔다. 박도신 부집행위원장은 이에 대해 ‘대중적이고 재밌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며 OTT 작품에도 문이 열려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다고 답했다.
이후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 <전,란>의 개막작 선정이 앞으로의 시장을 어떻게 바꿀진 알 수 없지만 일단 <전,란>은 박도신 부집행위원장의 말처럼 대중적이고 재밌고 완성도 높은 영화다. 쟁쟁한 배우들과 양면에 각각 다른 색을 장착한 각본, 다방향으로 치고 나오는 다채로운 액션, 빠르게 돌파하는 과감함까지 모두 갖춘,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다.
<전,란>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임진왜란의 전, 후사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영화는 비슷하지만 다른 운명을 타고난 두 남자 종려와 천영의 우정과 증오, 각자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의지를 연료 삼아 나아간다. 그리고 흑과 백, 적과 청, 진실과 오해를 맞붙여 스파크를 튀기다 끝내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낸다.
마음껏 실력을 뽐내는 배우들
배우들은 이 커다란 불꽃을 가운데 두고 맡은 인물을 마음껏, 맛있게 요리해 내놓는다. 영화 <군도>이후 약 10년 만에 양반이 아닌 노비 천영이 되어 나타난 강동원 배우는 헤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귀신같은 몸놀림을 보여주고 그에 대척하는 양반 종려를 맡은 박정민 배우는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진중하게 무너뜨리고 재조립한다. 비겁한 임금 선조를 맡은 차승원 배우는 자칫하면 모든 게 과도해 보일 수 있는 인물을 한 끗 차이로 비틀어 단단하게 만든다. 의병대와 일본군의 선봉장 겐신을 맡은 진선규, 김신록, 정성일 배우의 김자령, 범동, 겐신은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깊은 매력을 뽐낸다.
<전,란>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각자의 정도(正道)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들은 주어진 운명과 계급에 순응하기보단 그에 맞서길 선택하고 자신에게 꼭 맞는 무기를 손에 든다. 각 무기에 주인의 운명과 의지가 투영되고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단단히 막혀있던 계급과 운명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간다.
비슷하지만 다른 운명을 타고난 종려와 천영은 허물어지고 있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지키는 자와 허무는 자가 되어 대립한다. 두 사람은 적, 청색의 도포를 두르고 흑, 백의 검을 든 채 마주 선다. 서로의 거울이자 한 덩어리의 실체와 그림자 같기도 했던 두 사람은 갈등의 끝에서 서로를 그림자로 둔 하나의 온전한 실체로 독립한다. 이 과정은 마치 애증 관계 연인의 이별 같기도 하고 고상한 성장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타고난 운명을 무르고 함께 회초리를 부수던 천영과 종려
어른이 되어 서로에게 새로운 운명을 부여하다
천영과 종려는 원래 양반이라는 같은 운명을 타고났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천영은 그가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노비로 팔려갔다는 이유로 나이가 먹은 후 노비의 운명을 새롭게 부여받게 되지만 유명한 무도 집안의 외아들인 종려는 쭉 양반의 신분을 유지한다.
처음 천영이 노비로 팔려왔을 때, 그는 종려를 대신해 매를 맞는 몸종이었다. 하지만 천영은 종려보다 빠르게 무예실력을 키웠고 그것을 종려의 아버지가 보게 된 후 천영은 종려의 몸종이 아닌 대련 상대가 된다. 종려는 이 소식을 전하며 바닥에 앉은 채 눈물을 흘리는 천영을 향해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그리고 천영이 만들고 있던 회초리를 함께 부순다. 두 사람은 천영을 후려치던 회초리처럼 천영을 괴롭히는 노비라는 신분, 상하 관계를 부수고 같은 높이에 앉는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된 두 사람은 함께 자란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혼란한 시대를 겪으며 서로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종려는 천영 덕분에 장원급제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에 대한 오해를 시작으로 칼에 분노를 담아 휘두르는 법을 깨달으며 운명이 바뀌게 되고 천영은 종려에게 희망이 담긴 어사검, 청천익을 선물 받고 그것을 휘두르며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간다.
붉은 천 아래 숨어있던 것
천영과 종려가 손에 감은 붉은 천과 흉터의 의미
매일같이 검을 맞대며 닮아가던 두 사람은 국가의 붕괴와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겪으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고 둘 사이는 우정이 아닌 증오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변치 않은 숨겨진 무언가가 남아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7년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닮아있고 서로를 죽이지 못한다.
겐신은 천영과 종려. 두 사람과 칼을 맞대보고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라고 말한다. 적, 청색의 옷. 흑, 백의 검을 쓰는 천영과 종려는 서로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왼손의 붉은 천과 그 밑에 있는 흉터(상처)다.
천영이 무과 시험을 보러 가던 날, 종려는 천영의 손에 있는 노비 낙인 위에 붉은 천을 둘러준다. 이 붉은 천은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과 믿음, 범동한 세상을 향한 종려와 천영의 바람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받기 전까지 쭉 이 붉은 천을 두르고 다닌다. 이 붉은 천이 둘의 운명을 이어주는 매개체나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오해와 분노가 쌓여가면서 두 사람은 손에 감아뒀던 붉은 천을 풀어낸다. 종려는 전쟁이 시작될 때 붉은 천을 풀고, 천영은 전쟁이 끝난 후 한양으로 돌아왔다가 김자령과 동료들을 잃은 후 그것을 불태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붉은 천만이 아니다.
전쟁 후 천영과 의병대에게 잡힌 겐신은 천영에게 묻는다.
“붉은 천 아래 무엇을 숨기고 있나?”
붉은 천 아래엔 흉터가 있다. 천영이 잡혀왔을 때, 천영이 동료를 잃고 종려를 찾아갔을 때. 천영과 종려가 이러한 큰 분노 앞에서도 서로를 죽이지 못하고 겨우 만들어둔 흉터, 천영과 종려가 같은 손에 붉은 천을 두르게 만든 붉은 흉터 말이다.
오해가 생기고 붉은 천을 풀어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충분했으나 그들은 어떠한 순간에도 서로에게 진심으로 칼을 휘두르지 못한다. 흉터처럼 여전히 남아있는 함께 검을 맞대며 꿨던 꿈, 오래 쌓아온 우정이 두 사람의 사이를 꽉 묶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영과 종려는 잠시 서로를 오해하고 붉은 천을 풀어내기도 하지만 계속해 상대의 손에 새로운 상처를 내며 그가 다시 붉은 천을 감게 만들고 진실을 나누며 결국엔 예전처럼 한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종려의 이름이 적힌 하얀 칼, 어사검의 의미
종려와 천영이 함께 이뤄낸 것
종려는 천영에게 청천익을 입혀보며 천영이 진짜 주인이라 말하고 그가 도망칠 때 면천 받을 방법(오랑캐를 잡아라)을 알려주며 어사검을 쥐여준다. 이 어사검은 앞서 말한 붉은 천과 비슷하게 범동한 세상을 향한 두 사람의 희망, 종려가 천영에게 남긴 불씨라는 의미를 갖는다.
양인으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추락한 후 노비가 된 천영은 자신의 신분과 부당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천영은 종려의 집으로 팔려갈 때 아버지가 깎아줬다는 나무칼을 휘두르는데, 종려의 집안에 들어가는 순간 칼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그 칼은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에 처박힌다.
천영이 자신보다 앞서 매를 맞다 결국 죽게 된 몸종을 목격한 날, 그는 불씨가 남아있는 검을 등에 지고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아버지는 목을 메 자살한 후였고 천영은 뒤따라온 광이의 손에 잡혀 종려의 집으로 끌려간다. 천영은 이때 칼을 한 번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뺏겨버린다.
해무 속에서 겐신이 종려와 칼을 맞댈 때, 겐신은 왜 천영이 이종려의 칼을 갖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 종려는 “내가 주었느니라.”라고 답한다.
종려는 어린 천영이 뺏긴,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나무 검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 어사검을 밀어 넣으며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남긴다. 그는 천영의 숙적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선 천영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희망 같은 존재로 비친다.
종려는 모두가 무시했던 천영을 존중해 주고 그가 종려의 아버지에게 속아 큰 위험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어사검을 쥐여주면서 면천 받을 방법을 알려준다. 천영은 종려가 건넨 말을 희망 삼아 열심히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 노력한다.
천영은 종려의 이름과 마음이 담긴 어사검에 왜구를 향한 분노와 삶에 대한 희망을 담아 올바른 방향을 향해 휘두른다. 반면 어사검을 천영에게 주고 검은색 칼을 들게 된 종려는 죽이겠다는 분노를 담아 칼을 휘두른다. 그는 가끔은 칼 대신 일본군처럼 총을 사용하기도 하며 마치 자신의 이름과 신념을 잃은 사람처럼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한다.
종려는 천영이 든 어사검과 수십 번 칼을 맞대고, 천영이 그의 손에 남긴 상처 위에 붉은 천을 다시 두르고 나서야 진실을 깨닫고 이전처럼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회초리를 함께 부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이 외부의 힘(겐신)에 함께 대응한다.
천영은 자신의 등을 내주고 종려는 천영을 지키기 위해 겐신 앞을 막아선다. 종려의 칼이 부서지며 종려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천영은 부러진 어사검과 종려가 쓰던 검은 칼을 들고 겐신을 무찌른다. 종려와 천영의 희망이 담긴 어사검은 그 마지막 순간에 함께한다. 이 승리는 천영과 종려가 함께 이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천영은 종려가 남긴 붉은 천을 손에 감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어사검과 그가 쓰던 검은 검을 등에 지고 종려와 함께 꿈꿨던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간다.
흔들리는 땅. 그곳을 지킨 평범한 사람들
엔딩크레딧에 담긴 의미
천영과 종려의 우정이 제대로 흔들리게 된 근간은 바로 불안정한 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노비문서를 이유로 두 사람의 신뢰가 깨지긴 했지만 종려는 천영을 미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름이 적힌 칼을 손에 들려보냈으며 천영은 종려에게 진심으로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영이 추노꾼에게 잡혀왔을 때쯤,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모든 게 불안정해지자 노비들이 난을 일으킨다. 종려는 그때 집안에 있었던 천영을 오해하고 본격적으로 그를 죽이겠다 생각하며 칼날에 분노를 담아 휘두른다. 두 사람의 우정과 신념은 흔들리는 땅 위에서 무너진다.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남은 백성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온갖 것들을 손에 들고 거리로 나온다. 소 잡는 칼을 든 백정, 농사에 쓰이는 도리깨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범동, 온 집안을 팔아서 의병대를 유지한 의병장 자령. 그리고 칼을 올바른 곳으로 휘두르는 천영.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뭉친 의병대의 주둔지는 시체 다리 한쪽이라도 먹어야겠다는 한양의 분위기와 다르게 희망차고 푸르르다. 이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이어져 왜구를 이겨내고 내부의 썩은 권력자에게 놀라운 한방을 날린다.
나라를 지킨 건 위엄 있는 왕도 돈이 많은 양반도 대의를 가진 무관도 아닌 그저 내 삶을 지키고자 한 평범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평범함을 보장받는 동그란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작은 기적을 보여준다.
배우나 캐릭터의 이름값, 출연 비중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는 보통의 엔딩크레딧과 다르게 <전,란>의 엔딩크레딧은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서를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다. 천영과 의병대가 추구했던 정신을 끝까지 끌고 온 엔딩크레딧까지 감상을 마치고 나니 왠지 세상이 조금은 더 희망차게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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