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가 없다면 없는 대로.

영화 [Her]

by 공간

무표정으로 등장한 테오도르는 의뢰인을 대신해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는 아내와 이혼을 준비하는 평범한 남성이다. 가끔 외롭기도 하고, 적적할 때면 가볍게 욕구를 나눌 상대를 찾거나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한다. 그의 하루는 공허하게 비어있다.



안녕하세요. 나는 사만사예요.


텅 비어있는 그에게 다가온 사만사. 그녀는 os 인공 체제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테오도르의 삶을 순식간에 가득 채워버린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 그가 즐겨 듣는 음악과 취향을 그녀는 모두 존중하며 테오도르와 사랑에 빠진다.




01. 살만해지면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우울한 노래를 찾아 듣거나 일부러 구름 낀 하늘 밑을 걸어보기도 한다. 딱 살만큼만 우울하고 지겹다면,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은 그저 내 우울에 회색빛 물감을 조금 덧칠하는 일과도 같다. 모든 것이 무료해질 때쯤 찾아온 그녀.

사만사를 만나기 전 테오도르는 아내와의 강렬한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도 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눈을 감고 사만사를 떠올리면 과연 무엇이 그려질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녀.




02. 실체가 없다면 없는 대로.


데카르트는 사고하는 이성만을 긍정했다. 지금 내 손에 와 부딪히는 바람의 촉감도, 발밑에 떨어지는 햇살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혼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만난 아내에게 사만사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순간, 아내는 테오도르에게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냐며 질책한다. 실체가 없는 컴퓨터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냐며 아내의 눈빛은 테오도르를 채찍질한다. 지금 그의 앞에 앉은 아내의 찌푸린 미간을 입술로 사랑스럽게 훑던 테오도르는 지금 없다.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사만사의 존재가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03. "우리 사진 찍어요."


사만사는 테오도르에게 사진을 찍자고 제안한다. 다만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으니 음악을 '사진화'하는 것이다. 함께 있는 시간을 담아 멜로디를 쓰고, 가사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그의 우쿨렐레 연주에 맞춰 인화되는 사진. 무엇이 그들의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사랑이라 한다면 서로에게 파여있는 어떠한 흠집들을 매우고, 단단하게 굳어 더 이상 상처 나지 않도록 호호 불어주는 일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껴 숨어버린 테오도르와, 육체가 없지만 예민하게 감정을 느끼는 사만사는 서로가 서로의 흠집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흠집에 알맞게들어와 외풍을 막아주는 존재.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부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