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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밍키 Mar 13. 2023

집으로 가는 길을 잃었을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10년 전 혼자 뉴욕 여행을 갔을 때다. 타임스퀘어에서 밤에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해서 구경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이 끊겼다. 핸드폰 배터리까지 나가서 손발이 묶였다. 내가 얼타고 있는 걸 눈치챈 노숙인이 나에게 계속 말을 시키고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바지 밑단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옆에 있던 노부부가 노숙인을 혼내주고 나를 안전히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날 노부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다리가 풀려서 숙소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다.


이런 귀인을 만나지 않는 이상,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 가는 일보다 숙소에 무사히 돌아오는 일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타임스퀘어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저희 집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임스퀘어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나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는 오직 나만 안다.

출처 라디오스타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긴장된다. 헨젤과 그레텔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이 터졌고, 짱구네 가족도 신나게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못 돌아와 안달이 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만신창이가 된 짱구네




나는 일을 할 때도 여행을 할 때처럼 숙소와 목적지를 설정한다. 여기서 숙소는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일 것이고, 목적지는 도달하고 싶은 목표일 것이다. 어렵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내 몸과 마음과 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초심이 충전됐다면 다시 다른 목표를 설정한다.


예를 들어 <문명특급>은 애초에 아직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나 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는 의도로 팀원들과 기획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케이팝과 아이돌 문화를 '빠순이 빠돌이'로 비하하며 비주류로 취급하는 기존 매체의 톤을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돌을 같은 직업인으로, 케이팝 문화를 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주류의 문화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다행히 우리의 첫 번째 목표에는 어느 정도 가깝게 다가갔다. 우리 프로그램이 케이팝 문화의 인식 개선에 짱돌은 던졌다.

짱돌 챙겨 다니던 시절




그렇다면 이제 <문명특급>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한다. 그전에 반드시 다녀올 곳이 있다. 바로 '우리의 숙소'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초심이다. 다시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문명특급>을 위해 팀을 이룬 이유를 복기해야 한다. 사실 2022년 하반기부터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당시 <문명특급> 콘텐츠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도 볼 수 있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고 제작진 사이에서도 여러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얘기한 것처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원래 더 어렵다. 여러 잡음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최대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지도를 보려고 노력했다. 중간중간 길을 잃기도 했고, 배터리가 나가기도 했고, 배를 곯아보기도 했고, 방해꾼을 만나기도 했고, 그렇게 지지고 볶다가 이제 비로소 우리의 숙소를 찾아 무사히 복귀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문명특급> 그 자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대중문화의 중심인물을 섭외하는 것을 넘어 우리 프로그램이 다루는 이야기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들여하는 이야기는 힘 빠진 낙엽처럼 뒹구는 걸 봤다. 객관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은 아직 수면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우리를 꺼내줄 사람이 없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건 셀프다. 우리는 충전이 아마도(?) 끝났다. 새롭게 합류한 나나와 델마와 버터도 자기 자리를 찾아 준비를 마쳤다. 나나는 제작 시스템을 혼자 컨트롤할 수 있고, 델마의 편집 속도와 퀄리티는 아주 높다. 버터는 뉴미디어 플랫폼을 유연하게 활용한다. 야무지게 서로의 짐을 나눠 들고 두 번째 목적지로 떠나야 한다. 가는 길을 모를 때는 일단 쌔리는 게 답이다. 뭐라도 방법이 있겠지;


출처 문명특급




Side note: 숙소로 돌아온 저희를 환영해 준 문명인 분들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https://youtu.be/O0-QWE2iR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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