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뷰론 마니아’인 이동희 칼럼니스트의 티뷰론 시승 소감을 살펴봤다.
올드카는 개인의 경험과 추억이 깃드는 대상이다.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현대자동차 티뷰론 역시 내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차다. 티뷰론이 세상에 나온 1996년부터 자동차 전문 기자로 일을 시작했고, 1997년 말 티뷰론 스페셜을 구입하며 ‘자동차 칼럼니스트’라는 지금의 나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티뷰론 시승기에는 나의 사심이 가득 담겼음을 먼저 밝힌다.
티뷰론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과거 국내 자동차 문화의 저변을 설명하고자 한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다. 국토교통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1980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53만 대에 불과했지만, 이로부터 12년이 지난 1992년에는 523만 대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도로에 구경할 차가 늘어난 건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커진 관심을 충족할 만큼 자동차에 대한 정보는 얻기 힘들었다. 매월 자동차 전문지를 구입하고 기사를 읽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미국 자동차 전문지에서 처음 본 빨간 스포츠카에 반해 영어 사전을 펼친 후 기사를 밤새 해석한 적도 있다. 스포츠 주행 요령 기사를 읽은 뒤엔 밤마다 부모님 차를 몰래 끌고 나가 산길과 강변을 달리기도 했다. 이렇듯 나에게 자동차 전문지는 차를 배우고 익히는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되는 그런 교과서였다.
1996년 4월 티뷰론이 출시되자 자동차 전문지에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개발자 인터뷰, 계측기를 동원한 주행 테스트, 수입 스포츠카 비교 시승 등의 티뷰론 기사가 몇 달 동안 자동차 전문지를 가득 메웠다. 당시 기사에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특히 ‘달리기 성능에서 OO한 부분은 티뷰론이 우세했다’라는 기사들은 티뷰론을 갖고 싶은 마음을 키웠다.
지금처럼 자동차 시승이 쉬운 환경이 아닌 때라 오너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신차인 티뷰론을 운전할 기회가 없었다. 결국, 자동차 전문지에 실린 티뷰론 기사를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자동차 전문지의 ‘기자 공채 공고’를 접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전문지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월간 〈자동차생활〉과 〈카비전〉에서 신입 기자를 뽑는 것이었다. 자동차 전문 기자가 되면 티뷰론과 같은 스포츠카를 쉽게 자주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즉, 티뷰론이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끈 것이었다.
한편, 티뷰론의 등장은 국내 자동차 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본격적인 스포츠 드라이빙이 가능한 티뷰론이 서킷을 주름잡으며 모터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판을 키웠고, 티뷰론을 중심으로 엔진 출력, 섀시, 서스펜션 등을 개선하는 퍼포먼스 튜닝 붐이 일었다. 자동차 외관에 장식을 붙이는 수준에 그칠 만큼 보잘것없던 튜닝이 티뷰론 덕분에 번듯한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자동차 전문지도 이에 맞춰 튜닝 섹션을 구성하거나 튜닝 전문 잡지를 별도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내가 근무하던 〈카비전〉에서도 1997년 중반부터 튜닝 섹션을 다뤘고, 나는 이를 담당하며 튜닝카 기사를 쓰게 됐다. 문제는 차별화였다. 몇몇 튜닝샵에서 새로 꾸민 티뷰론의 소식이 여러 자동차 전문지에 동일한 내용으로 실리다 보니 독자들을 사로잡을 나만의 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티뷰론 스페셜이 1997년 12월에 출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티뷰론 스페셜은 모터스포츠 출전을 위한 500대 한정 호몰로게이션(Homologation, 경주차와 비슷한 사양의 양산차를 일정 대수 판매해야 하는 규정)이자 현대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모델이었다.
“매달 하나씩 튜닝을 하며 그 결과를 직접 알리자”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티뷰론 스페셜 국내 1호차를 계약하고 오너가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티뷰론 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기사가 독자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휠, 타이어, 쇽업소버, 서스펜션 스프링 등의 조합을 바꾸며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랩타임을 측정했다. 오픈형 흡기 필터, *하이 듀레이션 캠샤프트, 튜닝 머플러 등의 퍼포먼스 튜닝을 하고 섀시 다이나모미터에 올려 출력의 변화를 살피기도 했다. 이처럼 튜닝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티뷰론의 모습을 객관화된 수치와 개인적인 소감으로 전달한 점이 연재 기사의 인기 요인이었다.
*하이 듀레이션 캠샤프트(High duration camshaft): 기존 캠샤프트와 다른 밸브 개폐 타이밍 및 양정(밸브가 밀어 올려지는 높이)으로 엔진의 흡입 공기량을 조절한 캠샤프트. 엔진의 토크밴드를 조정하거나 고회전 시 출력을 개선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당시 중학생, 고등학생 독자들에게 티뷰론은 드림카였고, 이를 직접 타며 기사를 쓰는 나는 그들에게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사족이지만 10여 년이 지난 어느 자동차 행사장에서 만난 후배 기자로부터 “선배의 [티뷰론 일기]를 보며 자동차 전문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똑똑한 친구를 험한 길로 끌어들인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그러던 중 IMF 금융 위기가 들이닥치며 차량 운용 환경이 나빠졌다. 리터당 600원 수준이었던 휘발유 가격이 두 배로 치솟았고, 회사에서 지급하는 월급과 취재 비용까지 줄었다. 그럼에도 티뷰론을 운전하며 얻는 즐거움은 컸다. 야근을 마치고 밤늦게 한가한 도로를 가르며 퇴근할 때, 휴일에 가까운 고갯길로 드라이브를 떠날 때, 신나게 주행한 후 배기계통 촉매가 식으며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2년간 연재를 마치고 ‘후륜구동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에 티뷰론을 떠나보냈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HMG 저널의 이번 티뷰론 복원 프로젝트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해당 영상의 출연자로 차량이 복원되는 과정을 살피며, 마치 내 차가 살아 돌아올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무엇보다 티뷰론을 타고 달려 보는 건 정말 바라던 일이었다.
쿠페 특유의 긴 도어를 연 뒤,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실내로 넣으며 세미 버킷 시트에 앉았다. 이어서 시트 위치를 잡기 위해 오른손으로 시트 앞의 슬라이드 레버를 당기고 엉덩이를 움직여 시트 레일 위치를 조정했다. 키를 돌려 엔진 시동을 걸고 기어 레버를 살짝 당기듯 앞으로 밀어 1단에 넣었다. 가속 페달과 클러치를 조심스럽게 조작해 차를 움직였다. ‘우우웅’하는 엔진음이 적당히 커질 때쯤 다시 클러치 페달과 기어 레버를 적절히 조작해 변속을 이어갔다. 25년 만의 재회였지만, 티뷰론을 타고 조작하는 이 모든 과정은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2년 동안 수족처럼 다루며 모든 일상을 함께한 티뷰론은 내 몸에 새겨졌고 차와 함께하는 모든 동작을 신체가 기억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 놀랄 만큼.
운전석에서 내려다보이는 낮은 보닛과 불룩 솟은 좌우 펜더는 현재 기준으로도 스포티하다. 울룩불룩 근육질의 보디 디자인은 실내까지 이어져 직선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운전석 도어 트림부터 크래시패드까지 연결돼 운전자를 감싸는 듯한 실내 레이아웃은 지금 봐도 ‘운전자를 위한 스포츠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어깨 부분까지 높고 넓게 감싸는 앞 시트도 여전히 멋지다. 반면 성인이 앉으면 테일게이트 유리에 머리가 닿는 뒷좌석은 불편하다. ‘스포츠카니까 당연하다’고 우기며 친구들을 뒷자리에 태웠던 미안한 기억이 남아 있다.
티뷰론에 탑재된 베타 엔진은 현대차가 자체적으로 설계한 두 번째 독자 엔진이다. 배기량 2.0L 베타 엔진은 실린더 보어(연소실 내부 직경)와 스트로크(연소실 내부 상하 길이)가 82.0 X 93.5mm의 롱스트로크 설계다. 따라서 저회전 영역에서 제법 두툼한 토크를 발휘해 일상적인 주행에서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또한 팝콘 사운드를 강조하는 요즘 터보 엔진과 달리, 엔진회전수에 비례해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엔진 사운드가 묵직하게 전달된다. ‘스포츠카 감성이 충만한 자연흡기 엔진 사운드’라는 생각이다.
티뷰론의 5단 수동변속기는 직접 조작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요즘 차의 6단 수동변속기와 비교하면 짧은 기어비로 1~3단까지는 가속에, 4~5단은 고속 순항에 각각 초점을 맞췄다. 5단 기어로 시속 100km를 주행할 때 엔진회전수는 3,000rpm을 유지한다. 덕분에 정속 주행 시에도 가속 페달만 밟으면 충분히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참고로 티뷰론 TGX, 스페셜 두 모델은 급가속 시 3단에서 시속 100km를 기록할 수 있어 운전자에게 빠른 변속 실력이 요구됐다. 이는 당시에 엔진 튜닝을 통해 회전 한계를 높인 티뷰론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복원된 티뷰론으로 자주 다니는 고갯길을 찾았다. 300마력이 훌쩍 넘는 후륜구동 스포츠카로도 자주 달렸던 곳이다. 그 길을 25년 만에 티뷰론으로 주행하니 그저 웃음이 나왔다. 티뷰론은 최고출력이 150마력에도 못 미치지만, 짧은 기어비의 수동변속기와 공차중량 1,100kg대의 가벼움을 무기 삼아 솔직하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온갖 전자장비가 운전자를 돕고, 물리법칙의 한계를 바꾸는 요즘 차와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추억하는 티뷰론의 주행 성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복원 작업으로 티뷰론은 기존 검정색에서 TGX 고유 색상인 퍼니 레몬(Funny Lemon)으로 색상을 바꿨다. 레몬 빛 티뷰론은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현대자동차그룹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관련 영상에는 과거 현대차와 함께했던 혹은 동경했던 고객들의 댓글이 1,000개 가까이 달렸다. 저마다 기억에 깊게 새겨진 자동차 이야기를 하나씩 읽어 보니 감동으로 가득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 전역에는 티뷰론을 비롯한 과거 현대차를 좋아하고 추억하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메이저 자동차 제조사가 과거에 판매했던 모델을 차곡차곡 모아 복원하고 관리하는 것은 올드카가 이처럼 고객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동차가 모두 전동화되고,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율주행 기술이 무르익었을 때, 고객은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개인적인 친밀감과 긍정적인 경험에 기반해 자동차를 구매할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서 누적된 기억으로 이루어진, 기계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최근 누적 생산 1억 대를 달성한 현대차는 3년 뒤 창립 60주년을 맞이한다. 그간 현대차가 쌓아온 과거 유산이 복원돼 더 많은 세계인과 감동을 나누기를 기대해 본다. 진정한 자동차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사진. 최대일
글. 이동희(자동차 칼럼니스트, 컨설턴트)
〈자동차생활〉에서 자동차 전문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티뷰론 일기], [69년식 랜드로버 복원기] 등 큰 화제를 불러모았던 기사를 쓰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크라이슬러 코리아와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등에서 영업 교육, 상품 기획 및 영업 기획 등을 맡았으며 딜러로 자리를 옮겨 영업 지점장도 맡았다. 지금은 현업의 경험과 이론을 모두 갖춘 칼럼니스트 및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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