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사고와 변수가 끊이지 않았던 WRC 11라운드에서 3위를 차지하다
10라운드였던 그리스 랠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던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은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제11전을 준비했다. 10년 만에 열리는 WRC 뉴질랜드 랠리(Repco Rally New Zealand)는 멋진 해안 도로와 아름다운 스테이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벤트다. 1969년 시작해 1977년 WRC의 일원이 된 뉴질랜드 랠리에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명경기가 이어졌다. 그중 압권은 마커스 그론홀름(Marcus Grönholm)이 타이틀 경쟁자 세바스티앙 로브(Sébastien Loeb)와 0.3초라는 박빙의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던 2007년 경기다. 이는 WRC 역사상 2번째로 치열한(첫 번째는 2011년 요르단 랠리로 0.25초 차이) 우승 기록이다.
뉴질랜드 랠리는 2012년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가 2017년 지역 이벤트로 부활해 2020년부터 WRC에 복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는 등 부침이 잦았다가 올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WRC 캘린더에 돌아왔다. 뉴질랜드 랠리는 2001년 참가 팀이 뽑은 ‘올해의 랠리’에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멋진 풍경과 최적의 환경을 자랑한다. 촉촉한 흙과 자갈이 깔린 노면은 그립이 좋은 편. 오벌 코스처럼 안쪽으로 경사진 코너가 많아 잘만 활용하면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반면에 변화무쌍한 날씨가 변수다. 올해는 비 예보가 있는 데다 많은 선수가 뉴질랜드 첫 출전이다 보니 페이스 노트 작성부터 코스 적응, 랠리카 세팅에 이르기까지 난항이 예고되었다. 올해는 17개 스테이지, 279.8km에서 경기가 열리고 이동구간을 포함해 총 1,379.97km를 달리게 된다.
현대팀에서는 오트 타낙(Ott Tänak),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를 엔트리했다. 현재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2, 3위로 도요타팀의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ä)를 추격 중인 타낙과 누빌은 2012년 뉴질랜드를 달려보았던 경험이 있다. 당시 누빌은 시트로엥(카타르 월드랠리팀), 타낙은 M-스포트 포드 소속이었고 누빌이 종합 5위, 타낙은 초반 리타이어했었다.
이번에는 로반페라의 조기 타이틀 확정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더블 포디엄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특히 그리스에서 팀 오더로 2위에 머물렀던 타낙은 시즌 4승째를 목표로 의욕을 불태웠다. 경기 전 타낙은 “뉴질랜드에는 2012년에도 왔었고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예전 영상을 다시 봤는데 역시나 멋진 코스다. 달리기 좋게 경사진 코너들이 있고 마치 랠리를 위해 만들어진 길 같다. 다만 비슷한 길에서 테스트할 수 없어 적절한 세팅을 찾기가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핀란드에서 초반 리타이어 후 벨기에에서 개인 통산 최고인 4위를 기록했던 솔베르그는 이번이 뉴질랜드 랠리 첫 도전이다. 2012년에 출전했을 당시 3위를 기록했던 부친 페터 솔베르그(Petter Solberg)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고 경기에 임했다.
도요타팀은 칼리 로반페라를 필두로 엘핀 에반스(Elfyn Evans),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를 엔트리하고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까지 4대의 GR 야리스를 준비했다. 그리스에서 부진하기는 했지만 로반페라는 여전히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여정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뉴질랜드 랠리에서 타낙보다 7점 이상 포인트를 따면 자력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 도요타 드라이버진 가운데서는 오지에만 뉴질랜드 경험이 있다.
M-스포트 포드에서는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 로렌조 베르텔리(Lorenzo Bertelli)가 나선다. 원래 출전 예정이었던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가 그리스에 이어 이번 랠리까지 포기했고, 베르텔리는 개인 출전이기 때문에 챔피언십 포인트 합산이 가능한 것은 브린과 그린스미스 2명뿐. 벨기에 사고의 여파로 그리스를 결장했던 포모는 스페인 랠리에서나 다시 만나볼 수 있다. 참고로 프라다 가문의 큰아들인 베르텔리는 스폿 참전이기는 해도 2011년에 데뷔한 이후 매년 WRC에 도전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사정상 하위 클래스는 대부분 현지 드라이버로 채워졌다. 가장 눈에 띄는 드라이버는 2014~2018년 현대팀 소속으로 활약했던 뉴질랜드 드라이버 헤이든 패든(Hayden Paddon). 올해는 현대 i20 N 랠리2를 몰고 에스토니아, 핀란드에 이은 WRC2 3번째 출전이다. 또한 호주 랠리 챔피언 해리 베이츠(Harry Bates), 뉴질랜드 랠리 챔피언 벤 헌트(Ben Hunt), 뉴질랜드 슈퍼카 챔피언 셰인 반 기스베르겐(Shane Van Gisbergen) 등도 엔트리했다.
뉴질랜드 랠리는 북섬에 위치한 오클랜드(Auckland)에서 열린다. 옛 수도이자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항구 도시 오클랜드는 현 수도인 웰링턴(Wellington)보다도 인구가 많다. 요트가 즐비한 비아덕트(Viaduct) 항구 옆, 윈야드 쿼터(Wynyard Quarter) 재개발지구에 서비스 파크가 마련되었으며 목요일 저녁, 도심 동남쪽에 자리 잡은 전쟁기념관에서 오프닝 행사를 가졌다. 참가자들은 인근에 마련된 1.78km의 SS1 푸케카와 오클랜드 도메인(Pukekawa Auckland Domain)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전쟁기념관 주변 공원 도로를 활용해 만든 특설 스테이지는 2012년 경기 때와는 레이아웃이 많이 달라졌다. 경기 시작 직전 내린 비로 미끄러웠던 노면은 구름이 개면서 빠르게 말랐다. 타낙이 오프닝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가 되었고 브린이 0.9초 차 2위, 누빌이 1.6초 차이로 3위였다.
9월 30일 금요일. 이날은 SS2~SS7 6개 스테이지 158.56km의 장거리를 중간 서비스 없이 주파해야 한다. 아침 일찍 남쪽으로 이동한 참가자들은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29.27km의 황가 코스트(Whaanga Coast)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이 아름답고도 까다로운 스테이지는 뉴질랜드 랠리의 상징과도 같다. 오프닝 스테이지를 잡은 것은 그린스미스였지만 종합 선두는 브린이 차지했다. SS3(Te Akau South)에서는 에반스가 톱타임. 누빌이 스테이지 막판 스핀으로 15초가량 손해를 본 반면 타낙은 종합 2위로 부상해 선두 브린을 3.3초 차이로 추격했다.
18.53km의 SS4(Te Akau North)에서는 타낙이 이번 경기 2번째 톱타임으로 선두에 복귀했다. 로반페라에 이은 2번째 출발 순서지만 촉촉한 날씨가 노면 청소의 부담은 덜어주었다. 서스펜션 문제가 있는 누빌은 이번에도 스핀으로 시간을 잃어 타낙과의 시차가 40초 이상 벌어졌다.
오후에는 황가 코스트에서 오지에가 놀라운 페이스로 종합 선두가 되었다. 반면에 브린은 오버 스피드로 코너를 돌던 중 바깥 도랑에 빠져 18분을 잃었다. 코스는 완주했지만 클러치가 고장나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SS6에서는 로반페라가 톱타임을 기록한 데 이어 타낙이 2위를 차지해 종합 선두 오지에와의 거리를 좁혔다. 도중에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초반에 출발한 선수들이 다소 유리했다. 오지에는 나뭇가지에 걸려 리어 스포일러가 부서지는 바람에 애써 벌어 놓은 시간을 까먹었다.
타낙이 금요일을 마감하는 SS7을 잡아 에반스를 0.2초 차이로 제치고 종합 선두에 복귀했다. 그런데 토요일을 앞둔 밤, SS1에서 로반페라와 타낙, 누빌이 하이브리드 부스트 기준치를 넘은 것에 대한 처벌로 페널티가 결정됐다. 규정상 240kJ을 초과하면 안 되는데, 경기 직전에 변경된 수치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오버 부스트 상태로 경기에 임한 것(로반페라 240.16kJ, 타낙 241.03kJ, 누빌 242.04kJ). 세 선수가 5초씩 페널티를 받은 결과 에반스가 종합 선두에 올랐고 타낙이 2위로 밀렸다. 3위 오지에, 4위 로반페라까지 7.2초 사이에 몰려 있다. 그린스미스, 누빌, 솔베르그, 가츠타가 뒤를 따르고 패든은 WRC2 가운데 가장 높은 종합 9위를 달렸다.
10월 1일 토요일은 카이파라 힐스(Kaipara Hills)를 시작으로 푸호이(Puhoi)와 코모코리키(Komokoriki)를 반복하는 SS8~SS13의 88.28km 구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오프닝 스테이지인 카이파라 힐즈에서는 차를 고쳐 복귀한 브린이 가장 빨랐다. 이어진 SS9 푸호이에서는 이날 22번째 생일을 맞은 로반페라가 톱타임을 기록해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타낙이 4.6초 차이로 2위를 유지했고 오지에가 종합 3위, 에반스는 스핀하며 4위로 밀려났다.
에반스의 차는 손상이 커 SS10에서도 페이스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SS10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은 그린스미스였다. 전날 팀 동료인 브린이 리타이어함에 따라 그린스미스가 M-스포츠 포드의 남은 희망이 되었지만, S10 코모코리키에서 고속으로 배수로에 빠지면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이 사고의 영향으로 오지에, 타낙, 누빌, 로반페라가 같은 기록으로 처리되었다.
불행은 현대팀에도 찾아왔다. 금요일 마지막 스테이지였던 SS7에서 하이브리드 부스트 허용치 초과 사항이 발견돼 현대팀에 대한 추가 청문회가 이뤄진 결과 10초 페널티가 결정된 것이다. SS1 직후 문제를 인지하고 저녁 서비스 시간에 수정하려 했지만 시간 부족으로 SS4용 파라미터만 고치고 SS7용은 실수로 놓쳤다는 것이 현대팀의 설명. 반복적인 위반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팀 전원에게 10초씩 페널티가 더해졌다. 이에 따라 타낙이 종합 2위에서 3위로, 솔베르그는 가츠타 뒤 6위로 내려앉았다. 4위 누빌은 가츠타와 많은 시차가 있어 순위 변동은 없었다.
로반페라는 오후의 SS11, SS12를 연속으로 잡아 토요일을 종합 선두로 마무리했고, 오지에 역시 타낙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1-2 체제를 굳건히 했다. 토요일을 마감하는 시점에 타낙은 선두와 46.4초 차이로 종합 3위. 오전 내내 3단을 넣을 수 없었던 누빌은 기어박스를 교체했다. 솔베르그는 엔진 트러블에 시달렸지만 가츠타가 SS12에서 미끄러진 덕분에 5위로 올라섰다. 종합 6위는 현대 WRC2의 헤이든 패든이었다.
10월 2일 일요일. 오늘은 위트포드(Whitford) 숲에 마련된 8.82km의 위트포드 포레스트-테 마랑가 와이호(Whitford Forest Te Maraunga Waiho)와 새로운 특설 스테이지 잭스 릿지 하우누이(Jack’s Ridge Haunui)를 반복하는 SS14~SS17의 구성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타이어를 아끼는 순항 모드로 들어간 가운데 오프닝에서는 로반페라가 전날의 우세를 이어갔다.
SS15는 위트포드 사유지에 마련된 6.77km의 전용 스테이지에서 열렸다. 높낮이 변화가 심하고 테크니컬한 코스로 왕년의 뉴질랜드 랠리 챔피언인 앤드류 호크스우드(Andrew Hawkeswood)가 개발했다. 최종 파워 스테이지의 전초전 격인 이곳에서는 타낙이 로반페라를 누르고 톱타임을 가져갔다.
오프닝을 다시 달린 SS16에서는 오지에가 가장 빨라 톱3 드라이버들이 한 번씩 톱타임을 기록하는 접전을 펼쳤다. 이어진 최종 파워 스테이지. 로반페라가 다시 한번 톱타임을 잡아 완벽한 승리와 함께 시즌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지었다. 파워 스테이지에서는 타낙, 오지에, 솔베르그, 누빌이 2~5위로 추가 점수를 챙겼다.
로반페라가 뉴질랜드 랠리에서 우승함에 따라 2022시즌 드라이버즈 챔피언에 등극했다. 토요일에 22번째 생일을 맞이한 로반페라는 역사상 최연소 챔피언 기록도 경신했다. 기존 기록은 1995년 시즌 우승을 차지한 27세 109일의 콜린 맥레이(Colin McRae)였다. 뉴질랜드 랠리의 2위는 사파리 랠리 이후 오랜만에 복귀한 오지에, 3위는 타낙이 차지했다. 4위 누빌, 5위 솔베르그와 6위 패든까지 ‘현대 i20 N 랠리카’ 패밀리는 출전차 4대 모두가 득점권에 들어 높은 신뢰성을 입증해 보였다. 다만 도요타팀의 원투를 막지 못해 팀 포인트 차이는 81점으로 벌어졌다. 올해 WRC는 10월 20~23일 카탈루냐에서 열리는 제12전 스페인 랠리, 그리고 11월 10~13일 일본 나고야에서 최종전을 거쳐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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