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기술에 대한 현대자동차의 집념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은 그동안 밟아 온 자취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 방향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2013년 발간한 서적 〈남양연구소 발전사〉를 통해 그간 쌓은 R&D 역사 및 성과를 정리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가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미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자세를 가다듬고자 그동안의 성장 과정을 돌아본 것이었다.
특히 해당 책에 기술된 이야기 중 현대차가 본격적으로 기술을 정립한 고유 모델 개발과 관련된 내용은 전동화 시대를 맞이한 현재 시점에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체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발전시킨 과정을 살피면서 선진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한 현대차그룹의 오늘날 모습이 더욱 값진 결과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부터 자동차의 모든 핵심 구성을 독자적으로 완성한 엑센트까지 이어진 현대차의 기술 내재화 일대기를 〈남양연구소 발전사〉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2편에 나눠서 소개한다.
2023년 현대자동차를 대표하는 차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글로벌 전동화 시장을 이끄는 아이오닉 5와 아이오닉 6, 그리고 글로벌 베스트셀러인 투싼과 미국 시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팰리세이드 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의 창업 초기 30년 역사에서는 포니, 포니엑셀, 엑셀, 엑센트 등의 소형차가 핵심 모델이었다. 이런 소형차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대차가 차량 개발 기술을 빠르게 내재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고유 모델 포니는 ‘자체적인 기술력 확보’에 대한 현대차의 의지를 상징한다. 한층 진일보한 포니의 후속인 포니엑셀과 엑셀에서는 부품 국산화 비율을 높이며 국내 부품 산업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다. 엑셀의 뒤를 이은 엑센트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엔진, 플랫폼, 디자인까지 차량 핵심 구성 전부를 순수 독자 기술로 완성하는 결실을 맺었다. 무엇보다 엑센트에서는 현대차가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서 완전한 개발 역량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포니 출시 이후 엑센트가 데뷔하기까지의 시간차는 겨우 18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현대차는 짧은 시간 동안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로 우뚝 설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시간이었다.
자동차 제조는 철강, 화학, 조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에 속한다. 말 그대로 무겁고, 두텁고, 길고, 큰 제품을 생산하는 중화학공업을 의미하며, 대규모 투자와 고용을 동반하는 데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까닭에 대내외적인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그만큼 진입장벽 또한 높은 편이다. 그중 자동차는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제품이기에 더욱 까다로운 역량이 요구된다. 산업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는 기술과 상품성을 갖춘 제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과거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독자 기술 확보에 노력했고, 그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파워트레인 및 전동화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기술을 확보하고자 한 현대차의 도전은 창립 초기부터 시작됐다.
현대자동차가 대한민국의 자동차 제조사로 정식 출범한 것은 1967년이었다. 이듬해인 1968년 현대차는 울산에 자동차 조립 공장을 준공하고 포드의 소형 세단 코티나를, 1969년에는 포드의 중형 세단 20M을 각각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으로 생산했다. 이는 해외에서 부품을 수입한 뒤 국내에서 조립하는 형태로, 현대차가 자동차를 국내에 빠르게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생산 차량이 고유 모델이 아닌 데에 따르는 제약이 상당했다. 품질 문제가 발생하거나, 우리 실정에 맞게 차량을 개조하고 싶어도 함부로 설계를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를 조립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고자 결단했다. 단기적으로는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 생산하는 방법이 훨씬 쉬웠지만, 장기적으로는 자동차 제조사로서의 성장을 막았기 때문이다.
정주영 선대회장은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현대차의 로고를 달고 국내와 해외 모두에 판매 가능한 고유 모델 제작에 주목했다. 궁극적으로 엔진을 비롯한 모든 부품을 국산화해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내의 자동차 제조 인프라는 고유 모델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 과정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열악했다. 현대차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73년부터 고유 모델 개발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신차 개발 프로세스도 함께 정립해 나갔다.
현대차는 고유 모델 개발에 착수한 지 3년 만인 1976년에 포니를 출시했다. 포니의 등장은 전 세계 자동차 업계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국가 및 기업 간의 기술 장벽이 높고, 그 폐쇄성이 더욱 뚜렷하던 시절에 선진국과 선진 자동차 제조사만 가능하리라 믿었던 고유 모델 개발을 현대차가 해내면서 명실상부한 자동차 제조사로 발돋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포니 개발에 한국, 일본, 이탈리아의 기술 및 인력을 모두 동원했다. 자동차의 뼈대와 심장에 해당하는 섀시 및 파워트레인의 개발에는 미쓰비시의 소형차인 랜서를 활용했다. 하지만 서스펜션, 스티어링, 브레이크, 엔진 마운트, 배기 시스템 등은 샘플카를 분해한 뒤 역설계해 추후 개발을 이어갔다. 차량 구성 요소를 100% 도면화하고, 관련 기술을 빠르게 내재화하기 위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포니의 디자인은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업체인 이탈디자인(Italdesign)이 맡았다. 참고로 당시 이탈디자인을 이끌던 창업자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는 이미 폭스바겐 골프, 이스즈 117 등을 디자인하면서 명망이 높은 상태였다. 현대차 직원 10명이 1년간 이탈디자인에 파견돼 포니 디자인 개발 및 설계 작업에 참여해 자동차 설계 기본 개념과 도면 제작 방법을 익혔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차체 설계 기술을 축적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카로체리아 : 자동차 디자인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 주로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두는 경우가 많다.
현대차는 포니의 부품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해 처음부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기술 수준이 미치지 못하거나 시장성이 없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카뷰레터 등의 일부 품목만 수입해 장착했을 뿐, 대부분은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부품을 사용했다. 그 결과 포니의 부품 국산화율은 이전까지 생산한 코티나의 부품 국산화율(양산 첫해 기준 21%, 양산 1년 뒤 31.31%)과 비교하기 어려운 90%에 육박했다.
포니는 고유 모델로 개발된 만큼 우리나라 운전자의 체형과 도로 사정에 적합했고, 유지·보수의 이점까지 챙겼다. 이는 해외 차량을 그대로 도입한 국내 경쟁 모델과 확실한 차별점으로 부각됐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국내 운전자 사이에서 종합적인 경쟁력을 높게 평가받는 이유로도 작용했다. 이런 장점으로 포니는 출시 첫해에만 1만 726대가 판매돼 국내 승용차 판매의 43.6%를 차지했고, 단번에 최고 인기 차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현대차의 해외 수출도 본격화됐다. 현대차는 1976년 7월부터 1985년 12월까지 총 6만 7,387대의 포니(포니2 포함)를 중동, 아프리카, 남미, 캐나다, 서유럽 등에 내보냈다.
포니를 출시한 이후에도 현대차의 중형차 라인업은 여전히 코티나가 담당했다. 코티나는 유럽의 잘 닦인 도로를 달리기 위해 개발된 차였기에 도로 포장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국내 운행 환경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오히려 소형차인 포니가 성능 면에서 우수한 장점이 많았던 까닭에 코티나의 부족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됐다. 그러나 라이선스 모델인 코티나를 현대차가 우리 실정에 적합하게 개선하거나 수정할 방법은 없었다. 현대차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포니를 양산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은 1978년부터 새로운 중형차를 자체적인 기술로 개발하는 Y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1983년 출시한 스텔라는 이에 대한 결과물로 포니 개발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를 밑거름 삼아 만든 두 번째 고유 모델이었다. 스텔라의 가장 큰 특징은 미쓰비시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포니와 달리 자체적인 개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한 차라는 점에 있었다. 특히 플랫폼의 경우 코티나와 동급 독일 세단을 분해하고 비교 분석한 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즉, 유럽 자동차 제조사의 기술을 분석하고 이들의 장점만을 더해 내구성을 강화한 것이다.
현대차는 스텔라를 개발하면서 부품 공급 업체를 미쓰비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고를 수 있었다. 또한 부품 공급 업체의 국적 또한 일본 외에 미국, 유럽 회사 등으로 다변화했다. 가령 스텔라의 조향기구는 미국 TRW, 브레이크 시스템은 영국 걸링(Girling)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아울러 엔진 성능을 강화하기 위해 내구성이 검증된 미쓰비시 1.4L, 1.6L 엔진 두 가지를 탑재했고, 이후 부분변경을 거듭하며 1.5L, 1.8L, 2.0L 등으로 라인업을 개편했다.
디자인 개발은 포니와 마찬가지로 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가 담당했다. 스텔라의 외관 디자인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롱노우즈 웨지 스타일(Long Nose Wedge Style)로 공기저항이 적은 쐐기형 보디에 윈드실드 경사를 낮춘 차체가 특징이었다. 또한 스텔라는 공기저항이 줄어든 덕분에 최고속도, 가속 성능, 연비 개선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이처럼 기술 개발 측면에서 스텔라에 담긴 의미는 적지 않았다. 현대차는 스텔라로 포드 기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서 플랫폼 개발 기술 역량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를 맞이했다.
스텔라의 판매 또한 성공적이었다. 차량 계약을 받기 시작한 1983년 6월부터 3개월 뒤까지 1만 건의 계약이 몰리며,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는 1980년대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우리나라에서 소비자의 관심이 소형차 중심에서 중형차 이상으로 옮겨간 덕분이다. 참고로 스텔라가 처음 출시한 1980년대 초반에는 중형차가 오늘날 고급 승용차에 해당할 만큼 자동차 시장에서의 지위가 높았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국민 소득 증가 및 차종 다양화 추세에 따라 스텔라의 성격이 보다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끌던 스텔라는 1997년까지 판매됐다. 한편, 포니, 포터, 스텔라 등을 개발하며 차량 설계 실력을 쌓은 현대차는 세계 수준의 앞바퀴굴림 소형차인 포니엑셀의 탄생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2부에서 계속]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 : 자동차가 일반 대중에 보급되고 생활 필수품이 되는 현상.
글. 이인주
*2편에서는 포니엑셀과 엑셀, 엑센트의 개발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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