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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Mar 16. 2021

어린 딸에게 '결혼하지 말라'던 엄마

40여 년 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너의 삶을 살라'던 엄마

2021년 3월 16일 오늘,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노인대학에서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각각 70여분을 모시고 웰다잉 강의를 했습니다.


'후회 없는 행복한 삶, 웰다잉' 주제로 오전, 오후 각각 50분씩 강의를 진행하고,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나의 차에 몸을 싣는 순간, 어느 어르신 한분께서 "어찌나 알아듣기 쉽게 말도 잘하는지... 좋은 이야기 해 주어서 감사해요."하고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 순간, 40여 년 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너는 결혼을 하지 말고 이 넓은 세상에서 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라'하던 엄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고향의 집(일제시대 적산가옥)에서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고향에서는 꽤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 국민학교 바로 앞에 뾰족 지붕의 2층 집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가 다니던 원불교 오수 교당이 국민학교 앞에 땅을 사서 오수 교당을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원불교 교무 선생님은 아버지께 원불교 신축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부탁을 했었고, 새롭고 멋진 원불교가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교당을 신축한 앞에 제법 널찍한 땅이 여유롭게 남게 되었고, 그 땅을 매매해서 원불교 신축비용에 보태려던 교무님은 아버지에게 땅을 매매하는 일도 부탁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둘째 오빠는 그동안 고향에서 우리 열두 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신 부모님께 새로운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그 토지를 매입하였고, 그곳에 뾰족 지붕의 2층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2층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1978년 오수 국민학교 앞에 신축한 뾰족 지붕의 2층 집 뒷모습


2층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토요일 오후가 되면 바로 뒤에 있는 원불교 오수 교당의 학생회에 다니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결혼을 하지 말고 원광대학교 교학과에 입학을 해서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되거라."


"왜?"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 자식들에게 얽매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은 마음대로 못하고 살지 않더냐? 교회나 절하고는 다르게 원불교는 여자도 남자하고 똑같이 교도들 앞에서 설교도 하고,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외국에 가서 공부고 하고 그러더라. 비록 여자로 태어났지만 너는 결혼을 하지 말고 원불교 선생님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라."


그러나 그때의 나는 엄마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오수 교당에서 만나는 선생님이나 사람들 앞에서 저를 옆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가 우리 열한째요. 이름을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나라에서 밝은 비단처럼 크게 이름을 떨치라고 '밝은 명(明) 비단 라(羅)'라고 지었어요. 우리 명라는 원광대학교 원불교 교학과에 진학해서 원불교 전무 출신을 했으면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무 선생님들은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아휴~ 그래요? 정말 잘 되었네요~" 하고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바람처럼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평소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외갓집의 들러서 며칠 동안 외갓집에 머무르며 논밭을 관리했고, 언니 오빠들이 결혼해서, 혹은 자취를 하고 있는 서울에 가서 며칠 동안 지내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며칠씩 집을 비울 때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연탄불을 갈거나 아침밥을 해서 아버지 아침밥도 차려 드리고, 직접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로서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서 새벽 예불을 진행하는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엄마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너는 결혼하지 말고, 원불교 공부를 해서 원불교 교무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좋은 깨우침을 주는 설교도 하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매이지 말고 네가 살고 싶은 삶을 살라"는 말은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왜요?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서 원불교 교도들이 참석하는 새벽예불을 진행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마음을 크게 먹고 엄마에게 정색을 하고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나는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되면 아침마다 새벽 예불에 참석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는 쏙~ 뺐습니다.


"엄마, 나는 나중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어. 그래서 원불교 교무 선생님이 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으니까, 자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원불교 교무 선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마요."


"그러냐? 나는 네가 결혼을 해서 남편과 자식들에게 얽매어서만 살지 않고, 원불교 교무가 되어서 공부도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 앞 좋은 설교를 하면서 깨우침고, 또 외국도 자주 다니면서 넓은 세상을 마음대로 살았으면 했는데... 알았다."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잠깐이지만 아쉬움이 스쳐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단 한 번도 "너는 결혼하지 말고, 원불교 교무 선생이 되거라." 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2월, 엄마가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2014년 8월 웰다잉 교육을 받으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웰다잉 강사가 되겠다고요. 웰다잉 강사가 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들려줄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살아생전에 웰다잉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언제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 해서 열심히 웰다잉을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많은 어르신들 앞에 서서 '후회 없는 행복한 삶, 웰다잉' 강의를 할 때마다 2013년 2월 돌아가신 나의 엄마를 생각합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 강의를 듣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바람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둘이나 낳은 딸이지만 나름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빙그레 웃으면서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훗날 언제인가 나의 삶이 끝나는 날,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그동안 웰다잉 강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준 이 딸에게 엄마는 '잘했다~'하고 칭찬해 주시지 않을까요?


그때 엄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기 위해서 나는 많은 어르신들 앞에서 "눈 덮인 눈길을 걸어갈 때는..."하고 서산대사의 시(時)를 소개하면서 웰다잉 강의를 진행니다.


엄마가 앞장서서 눈길을 걸어가며 남긴 발자국을 따라서 나 또한 나름 열심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덮인 눈길을 걸어갈 때는... 서산대사의 시(時)를 소개하면서 웰다잉 강의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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