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 한국개신교회의 신사참배-
1930년대부터 일본은 팽창전쟁을 위해 군국주의적 파쇼체제로 들어섰다. 1929년 세계대공황의 경제 위기 속에서 일본관동군은 1931년 만주침략을 강행했다. 여세를 몰아 1937년 중국본토를 침략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 하와이를 급습했다.
이윽고 한반도는 전쟁수행을 위한 전시동원체제의 여파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하여 내선일체, 아시아 해방 聖戰의 주체, 황국신민서사, 대일본제국 신민의 천황 숭배,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황국신민화를 강제하였다. 1943년 7월부터 지원병제 실시하여 학도병 모집하였고, 1944년에는 아예 징병제 실시했다. 수많은 한국인은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자로 동원되어 강제로 징용에 끌려갔다.
일제는 종교계를 동원하기 위해 ‘종교 단체법’을 제정하여 종교단체와 그 활동 엄격히 감독했다. 그 목적은 ‘國體’ 고취였다. 국체란, 천황이 신성불가침한 살아 있는 신이므로 천황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매개로 국가를 일사불란하게 결집해 나갔다.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마련하여 기독교 통제하였고 ‘일본적 기독교’를 강요했다. 일본적 기독교란? 서구와 관계를 끊고 일본의 황민화 정책과 침략전쟁 수행에 순응, 협조하는 기독교를 말한다. 이를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나 일본의 팽창 전쟁을 위한 한국 개신교회의 역할은 부끄러울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모든 단체와 교단은 일본군국주의 파쇼체제에 순순히 응했다. 장로교의 경우,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연맹이사장 윤하영 목사)을 결성하고 적극 협력을 결의했다. 또한 ‘총회상치위원회’(총 간사 정인과 목사)를 조직하여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실천했다. 1939년 한 해에 벌인 일들만 열거해도 전승축하회 357회, 무운장구기도회 3,793회, 시국강연회 605회를 개최하였고 국방헌금 61만 엔을 비롯하여 놋그릇, 교회종 등을 헌납했다. 더 나아가 총회상치위원회에서는 1941년 8월, 전투기 헌납을 위해 15만여 원 모금하여 전투기를 헌납했다. 일제는 이 전투기에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감리교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41년에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을 결성하여 장로교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부일 협력했다. 정춘수 목사는 각 지역의 교회종 헌납 요구하였고, 1944년 9월에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상동교회를 폐쇄하고 ‘황도문화관’(관장 갈홍기)으로 둔갑시겼다. 이곳에 전국 감리교 교역자들을 모아 놓고 신도식 정결의식인 미소기 등 일본정신과 문화 교육을 시겼다.
일본군국주의 체제에 대한 부일협력은 교단을 초월하여 개신교 초기부터 성장한 개신교 엘리트들인 지도자나 유명인사가 주도했다.
감리교의 양주삼, 박희도, 신홍우, 류형기, 윤치호, 구자옥
장로교의 김응순, 김관식, 채필근, 백낙준, 홍택기, 전필순
성결교의 이명직
복음교회의 최태용
YMCA 유각경, 박마리아
연희전문- 유억겸
세브란스 의전-오긍선 등
각 교단, 단체 학교의 지도자들은 해당 기관의 부일협력을 주도하는 한편, 각종 애국단체의 임원을 맡아 전국 순회강연과 기고문을 통해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이들 다수는 과거 3.1 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학교 책임자였던 윤치호(연희), 유억겸, 김활란, 황신덕 등은 청년 학생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이렇듯 일제 말기, 한국 개신교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민족의 독립을 저버리고 일제에 기생하며 생존했다. 이 시기 한국개신교회의 변질, 개편과 부일협력은 개신교회 지도자들의 적극적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했던 선택이었다고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순종이 곧 믿음”이라 배웠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이들의 설득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족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등한시한 한국 개신교회의 친일 매국적인 행위는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죄책 고백’도 한 바 없었다. 오히려 친일부역자였던 자신들의 행적을 미군정시기 친미성향으로 신분을 세탁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