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치권을 달라한 것이지, 독립을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정춘수 목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명이었다. 선언서 발표 직후 체포된 29인을 본 그는,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3월 7일 경무총감부에 자수했다. 재판에서
“피고는 이 선언서에 기재된 취지와 같이 조선독립을 허(許)하여 달라고 청원한데 찬성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자치권을 달라는 것을 청원할 생각으로 명의를 내는데 찬성하였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나의 의사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의 민족 자치라는 것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고 1921년 5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한 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한국 개신교의 거물급으로 성장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서울에서 조직된 기독교 및 기호파 계열의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흥업구락부와 1927년에 결성된 최초의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 본부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흥업구락부는 주로 기독교인, 특히 서울과 경기도 출신의 기독교계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일제는 민족진영 인사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1938년 5월 19일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은 일본의 신민으로서 노력할 것을 맹세하는 전향성명서와, 국방헌금을 내겠다고 하고는 9월 3일 풀려났다.(「매일신보」 1938.9.4)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정춘수 목사는 일본의 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일의 길로 당당히 걸어갔다. 1939년 9월 28일 감리교의 3대 감독으로 선출된 그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전시동원 체제하에서 예배당을 팔아서라도 비행기 헌납을 하도록 독려했다. 그의 친일 논리는 「조선감리회보」 1941년 5월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교단이 혁신된 지 아직 일천하나 교사('목사' 명칭을 개칭함/필자)와 신도 제씨가 배전의 노력을 한 결과 많이 진보 정비된 줄 믿고 감사한다. 그러나 비상시국은 더욱 긴장의 도를 가하여 일소(日蘇) 중립조약에 성공한 아국(我國)의 외교는 남진정책이 적극화하여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의 확립이 불원한 한편, 태평양의 파도는 불가측(不可測)의 정세이다. 이 때에 우리는 가일층 우리의 복음전도전선의 민심을 확충하여 총후(銃後·후방지역/필자)의 민심을 통일하고 필승의 신념을 굳게 하여서 신앙보국에 진충(盡忠)하여야 한다. 교역자 신도를 물론하고 합심일체 되어 기독의 희생적 성애(聖愛)를 사회에 실현하여 교세의 진전(振展)을 도(圖)함이 급무이다"(「조선감리회보」 1941년 5월호)
대동아공영권과 전쟁협력을 “기독의 희생적 성애(聖愛)” 즉, 희생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합심하여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정춘수 목사는 희생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듯,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3월, 일제의 군용 비행기 헌납을 위해 전국의 39개 예배당을 폐쇄하고 교회 소유의 부동산을 매각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 목회자들을 교회에서 강제로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해방 후, 감리교는 19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기독교 황민화를 통해 경전을 모독하고 교회의 재산을 부정하게 처분했다는 이유로 퇴진을 요구했다.(「한성일보」 1947.3.7.) 이때 정춘수는 이동욱과 함께 조선기독교 감리교회를 일본기독교감리교로 개칭한 후 광희문교회를 11만원에 불법 매각하여 폭격기 한 대를 일본군에 헌납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3월 12일 정춘수를 체포했다. 그러나 정식재판을 받기도 전에 4월 16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정춘수는 한때 가문을 일으키고자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28세 되던 1901년 조선을 떠나기로 하고 원산에서 배를 타려고 머물던 여관에서 장로교 신자였던 여관 주인을 통해 전도를 받았다. 곧바로 원산 감리교회를 찾아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904년 6월 5일 원산 남산동 교회에서 영국인 선교사 하리영(河鯉泳, Robert A. Hardie)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남(南)감리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남감리교의 목사로서 교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개신교인으로, 목회자로 살았던 45년의 삶을 정리하고 1949년 11월 22일 천주교로 개종했다.
정춘수의 꿈은 입신출세였다. 그의 꿈대로 개신교 입교를 통하여 입신출세를 이루었다.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 때마다 일제의 권력에 아첨하면서 입신출세를 유지해 나갔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 개신교의 거물이었던 정춘수 목사는, 때로는 독립투사로, 때로는 일본의 신민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구차한 일신을 위해 생존하다가, 한국 전쟁기인 1953년 10월 12일, 77세의 나이에 피난 길에 머물렀던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강외면 궁평리의 집안 손자뻘 되는 정인환의 집에서 사망했다.
정춘수 목사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기 전인 1980년, 충북 시민사회는 우암산 기슭 삼일공원에 정춘수 목사를 포함한 지역 출신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을 건립했다. 오른쪽 끝에 버젓이 서 있던 정춘수 목사의 동상은 1996년 충북지역 시민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
입신을 위해 살다 간 정춘수는 죽어서 철물조차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정춘수 목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일신의 안위를 위해 강력한 권력인 일제라는 숙주에서 생존하고자 기생하며 살고자 발버둥 쳤던 모습을 상상하자니 애처롭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