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파리누쉬 사니이
알림. 이 리뷰는 소설의 결말을 포함하여 주요 줄거리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중동 세션 세 번째 책. 이번 책은 이란 작가 파리누쉬 사니이(Parinoush Saniee, 1949 - 현재)가 소설가로 처음 써낸 책, 「나의 몫」이다. 「나의 몫」은 출간 이후 이란 정부에 의해 두 번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국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기록을 세웠다.
680쪽이라는 두터운 분량에 북클럽 멤버 모두가 긴장했는데, 한 번 펼치고 나니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금방 읽었지만 책이 보여주는 삶이 깊고 고되어서 출퇴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읽는데 샘솟는 눈물을 삼키며 읽어야 했다. 책의 주인공 마수메의 삶에 빨려 들어가 산 듯한 며칠이었다.
소설은 총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수메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결혼 생활과 가모장으로써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 장성한 중년의 삶까지를 그린다. 그의 삶 매 장면이 삶의 기쁨과 고통으로 넘쳤으나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 세 가지를 꼽아보았다.
약국 청년 사이드와의 만남은 마수메의 유년시절을 대표하는 사건이 아닐까? 사실 이 둘의 만남은 만남이라고 하기에도 멋쩍다. 마수메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기쁜 마음으로 다니게 된 학교, 통학길에 한 약국에서 일하는 실습생 사이드와 마주친다. 사이드는 마수메에게 반하고, 마수메가 학교에 오고 가는 짧은 순간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강렬한 눈빛을 보내던 사이드는 편지로 마수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의 편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순진하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마수메는 갑작스러운 편지에 당황하는 한편 답장을 해야 할지 고심한다. 한편 마수메와 사이드 사이의 기류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남동생 알리는 편지를 증거로 마수메의 행동거지를 가족들에게 고발한다. 마수메의 가족들은 마수메의 행동이 불명예스럽다며 크게 분노한다. 마수메의 형제들은 사이드에게 폭력으로 보복하고, 마수메는 가족의 명예를 먹칠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집에 가둬 학교에도 갈 수 없게 된다.
1960년대, 이란이 여성에게 어떤 사회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이었다. 여자 아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동일하게 누리지 못하고, 보수적인 정조 관념의 사회가 어린아이들의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수피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불편하고 읽기 고된 부분이었다고 해주시기도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사이드는 고향으로 떠나고, 마수메는 가족들과 남겨졌다. 집안의 명예가 추락했다고 느낀 가족들은 남은 형제들의 혼삿길을 망치지 않으려 마수메를 집 안에 숨겨두는 한 편, 급히 마수메의 혼처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마수메가 자신의 신부도 타락시킬까 봐 마수메가 있는 동안에는 맘 편히 신부를 들일 수 없다며 혼사를 거부하는 형제들을 보며 납득이 가지 않는 한편 그 정도로 극심한 명예주의를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란 공동체에서 혼인의 사회적 의미와 가족의 명예란 무엇이었는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수메의 형제들은 동네 장사꾼에게 마수메를 팔아넘기듯 시집보내려 하지만, 이웃 여성 파르빈은 마수메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예감한 듯 중재자로 나서 다른 신랑감을 중매 선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결혼만이 살 길.) 마수메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하미드와 결혼하게 된다.
왜 맞서 싸우지 않았어? 왜 저항을 하지 않았냐고?
반항을 해봤어야지.
그녀의 남편 하미드는 자신의 삶을 사회 운동에 바치기로 한 인물로, 민중의 계몽과 이란 정치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는 한편 가정에서의 역할을 철저히 외면한다. 마수메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야간 학교 등록은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 도움은 주지 않는다. 대중의 삶을 위한 구호는 핏대를 세워가며 외치는 운동가이면서, 자신의 아내의 고초는 외면하는 남편이다. 또한 하미드는 전통적 관습을 배격하는 가치관을 가진 남편으로, 마수메가 실천하는 신앙과 보수적 가치들을 전면 거부하고 마수메에게 현대적 여성상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미드는 대의를 앞세워 가장 가까운 곳의 고통을 외면하는 인물이자, 당시 억압적인 이란 사회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당위시 된 폭력을 현현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정치적 자유를 꿈꾸며 이란 정부의 압제에 희생된 용맹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이란 혁명과 혁명 이후 사회 불안과 갈등을 그려내기에 탁월한 인간상이 아닌가 싶다. 자기모순적인 하미드에게 열 뻗치다가도 하미드의 순수한 열정을 응원하기도 하고, 그의 삶에 눈물 흘리기도 했다.
물리적 투쟁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하던 하미드는 결국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곧이어 아들의 처형 소식을 접한 시아버지도 생을 저버린다. 마수메는 자식 셋과 함께 유산 한 푼 없이 남겨진다. (이란 상속법상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는 경우, 아들의 가족은 상속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문이 닫힌 것만 같았다.
일자리도, 하미드도, 시아버지도, 집도, 유산도 없이
이마에 처형당한 공산주의자의 아내라는 낙인을 찍은 채
이 험한 바다에서 어떻게 나의 아이들을 구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단 말인가?
'모든 문이 닫힌 것만 같았다'는 마수메의 독백에 내 마음까지 옥조여 왔다. 무일푼, 무직, 고졸, 여성, 홀어미, 어린아이들, 사회적 낙인. 마수메 앞날이 역경으로 가득한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마수메는 굴하지 않고 계속 살아 나간다. 주어진 몫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몫을 해나가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수메는 어느덧 멋진 가모장이 되어 있었다. 마수메가 가정을 꾸리며 강조하는 가치와 실천들이 기억에 남는다. 마수메는 경제적으로 자립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일하고 공부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여의는 일을 겪은 아이들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살도록 노력했다.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동네 이웃 파르빈과 친구 파르바네의 도움도 받는다. 여성들의 우정도 감동스러웠지만 육아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어준 이웃 여성 파르빈을 보면서 이란 사회에서 이웃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의 명예를 중시 여기는 문화는 어쩌면 공동체와 상부상조해야만 하는 이란 사회적 구조에서 연유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바다님이 이야기해 주셨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떻게 딸의 목숨보다 가족의 명예를 귀히 여길 수 있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아버지가 걸은 길을 걷지 않기를 노심초사하며 보통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마수메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
마수메가 아들 마수드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털어놓는 부분을 읽어보며 마수메 삶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려 한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마그수디 씨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차도르를 입어주실래요?”
갑자기 화가 치밀어, 나는 마수드에게 쏘아붙였다.
“마수드, 우리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니?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신념과 원칙이 있어. 우리가 아닌 사람으로 계속 변신을 할 수는 없단 말이야. 내가 남자들의 기준에 따라 옷차림을 몇 번이나 바꾸었는지 아니? 콤에서는 차도르를 둘렀고 테헤란에서는 스카프를 썼고 너희 아버지와 결혼을 한 다음에는 히잡 쓰는 것을 싫어해서 스카프도 겨우 썼지. 그리고 라단에게 청혼하러 갈 때는 우아하고 멋지게 입으라고 했잖아? 그땐 목이 깊이 파인 원피스를 입어도 아무 말 않더니 이젠, 상관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서 나에게 차도르를 입으라는 거니?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다. (후략)”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그야말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가며 살아온 인생이다. 제한적인 자기결정권만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극적으로 바꾸어가며 살아온 삶으로 인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삶의 궤적이 비극적으로 느껴져 안타까운 한편 마지막 거절의 말속에서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마수메의 결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가장 큰 수확을 꼽으라면, 내 관념 속 세계지도의 해상도가 조금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특히나 아랍-이슬람이라는 단 두 단어만이 존재했던 나의 중동 세계에 이란이라는 국가와 페르시아 민족, 시아 이슬람이라는 다양한 선과 면, 빛깔이 더해졌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나의 몫」을 통해 배운 점들에 대해서 전해드리고 싶다.
마수메의 가족은 콤(Qom)에서 살아오다가 테헤란(Tehran)으로 이주했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테헤란으로 이주하면서도 테헤란이 자신들을 타락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 테헤란은 무척 서구화된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테헤란의 여학생들은 콤에서와는 달리 학교에 올 때 차도르를 입지 않기 때문에 내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내가 나쁜 물이 들어 부패하거나 타락한 계집애가 되지 않고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차도르를 입지 않고 머리를 가리는 스카프만 써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다.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그야... 마수메 가족이 살던 콤은 성스러운 도시니까....
콤은 8대 이맘 레자의 여동생 파티마 마수메의 묘가 있는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이고, 이란에서 가장 큰 신학교인 콤 신학교가 있다. 특히 이 신학교는 현 라흐바흐(이란 최고 권력가)인 알리 하메네이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종교 시설이 밀집해 있어 도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 가치를 중요시한다고 한다.
반면, 테헤란은 당시 서구 친화적인 왕권의 아래 빠르게 서구화된 도시였다. 당시 도시 사진을 보면 히잡을 쓰지 않고 서양 복식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소설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도시인 콤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 테헤란으로 이주한 마수메 가족을 통해서 당시 이란의 지역 간 관념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니, 그런데 1970년대의 테헤란에서는 머리칼과 종아리를 드러낸 여성도 많았는데, 2000년대의 테헤란의 여성들은 왜 다시 히잡을 쓰게 되었을까?
이란 여성들이 다시 히잡을 쓰고 차도르를 입게 된 것은 이란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란 혁명은 이슬람 혁명으로도 불리는 1979년의 정치 혁명이다. 이란 혁명으로 친미파였던 팔라비 왕조의 입헌군주제가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최고 권력을 가진 이슬람 정부가 탄생한다. 그럼 이슬람 정부란 무엇일까?
마흐무드와 하미드의 대화를 통해 이슬람 정부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의견대립이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혁명을 시작한 이유이자 원하는 단 한 가지는 이슬람 때문이야. 그러니까 정부는 이슬람 정부가 되어야 해.” 마흐무드가 말했다.
“그래요?” 하미드가 맞받아쳤다. “이슬람 정부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정부에서 모든 이슬람 교리를 시행한다는 뜻이지.”
“천사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인가요?!” 하미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의 계율은 신의 계율이야. 그 원칙은 세월이 지나도 뒤처지지 않고 늘 의의가 있다네.”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이슬람 정부 수립과 함께 전통적 종교 가치의 복구가 진행되며 사실상 신정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은 다시 히잡을 쓰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내게는 진보라기보다는 과거로의 회귀로 여겨졌다.
사실 이 소설에서 이란 혁명의 과정은 세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마수메의 목소리를 통해 혁명 전후의 이란 민중의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혁명 직후 잠시간 민중을 휩쓴 흥분 상태와 그 직후 지독하게 이어지는 혼란과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수메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결과적으로 혁명의 허니문은 한 달 이상 지속되지 못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그때까지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결속으로 가려져 있던 다양한 의견과 개인적인 성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격렬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가지 신념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사람들은 재빨리 편을 가르고 서로가 서로를 국민과 국가와 종교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매일 새로운 정치 그룹이 생겨났고 다른 그룹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무슬림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다. (크리스천 31.1%, 무슬림 24.9%, 힌두교 15.2%, 불교 6.6%, 2020)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약 90%)와 시아파(약 10%) 두 개 종파로 나뉜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에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두고 나뉘게 되는데, 중요한 점은 수니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시아파는 소수라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이슬람 문화권에서 시아파는 소수를 점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4개 국가(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아파 인구가 더 많은데, 이란은 그중에서도 시아 이슬람 종주국으로 절대다수(90% 이상)가 시아파 무슬림이다. 그래서 나는 은연중에 이란인들은 종교적으로 통합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서 그 안에서도 다양한 신앙심과 생활이 공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광신도적 신앙을 가진 사람도 나오고, 자신의 이권에 따라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도 나오고,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만의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도 나온다.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을 보며 무슬림에게 가지고 있던 단편화된 이미지와 편견이 조금은 깨진 것 같다. 신앙과 관련된 인상 깊은 대사들을 공유한다.
마수메, 마수메의 어머니, 파르빈 등 여성들이 자주 하는 대사이자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인 "나의 몫"에 관한 대사다. 신이 정한 몫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속에서 신과 운명에 대한 순응적 자세가 느껴진다.
신의 결정을 따라야지. 우리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는 날 이마에 새겨지는 거야. 그리고 각자의 몫도 따로 정해져 있지.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마흐무드는 마수메의 남자 형제로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율법에 엄격하고 종교 규율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마수메가 마흐무드의 모습 속에서 종교를 도구화하고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는 점을 지적하는 대사는 참 통쾌했다.
마흐무드 오빠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그 가증스러운 계집애가 또 죄를 지었어. 지금쯤 지옥 불에 타고 있을 거야.”
(중략) 가끔씩 나를 위해 코란 구절을 읽고 기도를 올리며 자신이 그토록 이해심이 많고 너그러운 오빠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나쁜 여동생인데도, 신께 나를 용서해 주시고 자신의 기도로 나의 죄를 가볍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겠지.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이란에도 종교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소설 속에서는 하미드와 그의 동료들이 그러하다. 마수메는 하미드의 동료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 식사 초대를 한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마수메와의 첫 대면에서 되려 그녀의 신앙을 조롱한다. 동료들에게 마수메는 미신에 빠진 인민이었으며, 하미드는 자신의 아내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동료였다. 그들 사이에서도 신앙과 공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샤흐자드와 하미드의 입장이 가장 공감되었다.
“그렇지 않아, 하미드? 솔직해지자고. 당신은 신앙을 완전히 버렸어? 그럴 수 있었냐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신을 없앨 수 있었어? 어떤 상황에서도 신을 부르지 않을 수 있었어?”
“아니,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중략) 나는 왜 다들 신앙을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격하게 주장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보기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고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있어. 버림받았다거나 외롭다는 생각도 거의 하지 않지.”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종교와 신앙생활을 해보지 못한 나에게는 소설 전체가 종교와 신앙에 대한 일종의 체험이었다.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자는 개인적인 결심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이란-이라크 전쟁 속에서도 전개되는데 이란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란-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 속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잊을만하면 공습경보를 울리며 그 존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외부적 사건처럼 그려진다. 실제 전시에 주민들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도 가족의 생활을 꾸리기 바쁘며, 마수메도 전쟁의 공포를 눌러두고 아이들을 피난시키고 생계를 이어나가는 데 전념한다.
하지만 마수메의 가족도 전쟁의 여파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들 마수드가 징병된 것이다. 마수드는 무사귀환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곧 실종된다.
나는 기차에서 만난 파란하니 부부와 함께 병원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들은 마침내 아들을 찾았다. 그는 얼굴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아들과 다시 만난 부모를 보니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혹시라도 마수드가 얼굴을 다쳤다면, 유난히 작은 발톱으로 아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폭력, 사회적 혼란과 불신, 가난을 야기하는 전쟁의 아픔을 보여준다. 전쟁의 가장 큰 고통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다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슬픔과 상실감이 아닐까.
소설이 시종일관 고통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마수메가 웃고 행복한 순간들도 가끔씩 있다. 사실 그 순간이 너무 적고 귀해서 삶에 환희하고 감사함을 느끼는 마수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찡했다. 마수메가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건 가족과 이웃, 친구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마수메가 하미드의 죽음으로 생기를 잃었을 때 찾아와 빛이 돼주었던 것도 그들이다. 신년 맞이 전통 상차림(S로 시작하는 일곱 가지 물건으로 복을 기원한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보리싹과 꽃,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사과, 지난날 인내에 대한 보상을 의미하는 푸딩, 사랑을 의미하는 대추, 태양을 상징하는 향신료, 다산을 상징하는 색칠 달걀이 올라간다.)도 잊고 하지 않은 마수메를 보고, 여동생 파티는 나무란다. 아이들이 슬픔에만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테이블에 일곱 가지 S는 올려놓았을 거라 생각했다고.
어쨌거나 지난해는 끝났어.
새해는 언니가 많이 행복해서
모든 고통을 보상받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망이야.
힘들 때 그 고통을 알아봐 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지.
마수메가 자신의 몫을 담담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고통이자 희망이라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얼마 전 한국도 설을 맞았더랬다. 생각해 보니 달님께 소원 비는 것도 잊었다. 나는 잊을 고통도 더 바랄 행복도 없었던가? 오늘만큼은 이란 여성들이 원하는 대로 입을 자유를 다시 되찾기를 바라본다.
1. 파리누쉬 사니이,「나의 몫」, 북레시피, https://ridibooks.com/books/2606000009
2. CIA,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the-world-factbook/field/religions
3. 외교부, 2021년 이란 대선 결과의 함의와 전망 https://www.ifans.go.kr/knda/ifans/kor/pblct/PblctView.do?clCode=P07&pblctDtaSn=13814&koreanEngSe=KOR
1. 이란의 어린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ran_girls_writing_in_blackboard.jpg
2. 1970년대 테헤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mhuri_Avenue_Shops,_Tehran,_1970s.jpg
4. 콤의 파티마 마수메 성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tabki_Sahn_at_Fatima_Masumeh_Shrine,_Qom,_Iran.jpg
5. 팔라비 왕조에 대항하는 민중 시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ss_demonstration_in_Iran,_date_unknown.jpg
6. 기도하는 이란 여성,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Old_Praying_Woman_in_Jame%27_Mosque.jpg
7. 군인과 어머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ran-Iraq_War_photos_by_Amir_Ali_Javadian_(01).jpg
8. 7개의 S가 차려진 테이블, RDNE Stock project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7157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