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커리어 프로들의 따스한 연말 모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는 일 이야기가 재밌을 수가 있겠어?

by H 에이치

연말 회고 인비테이션

Karola G @Pexels

연말, 조심스러운 제안 하나가 날아왔다.


올해 연말, 저희 회고 연말모임을 한번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

지난여름, 메모어에서 미드 커리어 모임을 이끌어주셨던 J님이었다. 연차 깨나 찼다 싶은 직장인들이 모여 커리어에 대해 회고해 보는 모임이었다. J님은 그간 모임을 진행해 오시며 겪어온 참여자들 간의 결과 고민이 비슷하더라며, 연말을 핑계 삼아 즐거운 모임 자리를 꾸려보고 싶다고 했다.


어머. 너무 재밌겠다.


수락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은 주춤주춤


아직도 J님과의 어색했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회고모임의 첫 밋업날, 어느 때보다도 시간 계산을 철저히 하여 출발했다. 혹여라도 너무 일찍 도착했다가는 굳은 공기 속에서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어쩔 줄 몰라할 나 자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약속된 시간보다 늦지 않으면서도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도착해야만 했다. 약속시간 5분 전쯤이면 적당히 두세 명은 도착해서 아이스브레이킹 하고 계시겠지?

나의 시간 계산은 정확했고, 환승도 딱딱 제시간에 해내서 약속시간 5분 전 딱 맞게 카페에 도착했다. 모든 계획이 철저했고 실행도 확실했건만, 도착해 있는 사람은 J님 한 사람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보다 늦을 거란 생각은 못했네. 힘껏 입고리를 올려 J님께 인사했다. 활짝. 인위적이고 어색한 나의 미소에 그녀가 겁먹지 않기를.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불확실한 거리 감각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얼마나 가까울 수 있을지, 나도 모르고 그도 모른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진다. 이런 질문, 무례하지는 않을까? 나에 대한 세부사항들, 궁금하긴 할까? 나의 사적 이야기, 상대방에게 부담은 아닐까?


J님도 분명 나와 같은 고민을 달고 사는 사람인 듯했다. 우리의 대화는 멈칫멈칫 주춤대긴 했지만 금세 평온한 박자를 찾았다. 다른 멤버들이 차례차례 도착하면서 입이 늘자 곧 활기로 공기가 가득 찼다.


J님이 만나온 멤버들과 연말 모임이라면 한결 맘 편히 참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는 얼굴들도 몇 있을 것이었다. 별 망설임 없이 모임 참석 의사를 표했다.


리사님의 사진


막상 모임날이 다가오자, 같은 고민과 같은 계산을 반복하는 나. 너무 일찍 도착하지 않으려면 몇 분에 출발해야 하지? 이 정도면 본성이 내향적인가 보다. 어색한 공기에 대한 걱정이 어딜 가든 늘 나를 따라붙는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해 출입문을 열고 J님을 발견하는 순간, 그 걱정은 사라졌다. 테이블을 감싸고 있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프로페셔널 워너비걸들


성별에 제한을 둔 건 아니었는데 이 날 모여 앉은 멤버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프로페셔널을 꿈꾸는 여자 일곱이 모이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명함으로 자기소개하기


자기소개를 하면서 명함을 교환했는데 참 낯설게 느껴졌다. 업무 외적인 자리에서 나를 소개하기 위해 명함을 꺼내 들어 본 적이 언제냐... 이제까지 나에게 명함이란 나의 이름보다는 이메일주소를 필요로 하는 상대들에게 명목상의 자기소개를 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따금 친구들에게 기념품처럼 쥐어주는 일을 제외하면 명함을 꺼내볼 일이 없었기에 명함 교환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한다는 건 묘한 일이었다. 회사 밖에서도 내가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달까... 직장인으로서의 자아는 작은 종이 한쪽에 단 세 줄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명, 부서, 직급, 이 세 가지만으로도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릴 수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IT와 연이 먼 사람들에게 내 직무에 대해 명쾌하게 소개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RDBMS의 데이터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가 너무나 IT적 언어로 짜인 소개라는 건 알겠으나 대체할 언어나 명료한 비유거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기업 시스템의 데이터 관리에 대해 고민하고, 조언하고, 고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될까? 다들 유려하게 자신의 생업과 보람을 설명해 내는데 나는 날 소개할 말을 잘 찾아내지 못했다.


이 날 참여하신 분들은 통신, 자동차 부품, 의료 장비,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등 다양한 도메인에 계신 분들이었고 직무와 연차도 다양했다. 모인 사람들의 다양성과 대비되게도 공통의 관심사만큼은 확실했다. 이 날의 대화 주제를 요약해 보자면 두 가지였다. 직장에서 고통을 주는 인간상과 대응법, 새로운 도전에 대한 계획과 응원.


직장인 고통의 원천, 인간


리사님의 사진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그룹을 이루면, 그중 꼭 한 명은 우리의 통점을 건드린다. 이는 직장 생활에서도 어김이 없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꼭 있다. 오히려 더 많다. 왜냐면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정함 하나라면, 직장의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친절함도 바라고, 효율성도 바라고, 성과도 바라기 마련이니까. 육각형의 인재란 현실에서 드물어서 언젠가 누군가는 꼭 우리를 진절머리 나게 한다. 그 이유 또한 가지각색이다. 성깔이 더러워서, 비협조적이어서, 느려 터져서, 실수가 잦아서, 책임을 미뤄서, 등 등 등. 이렇게 속 터지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험담을 풀어놓다 보면 알게 된다. '우리 회사에만 저런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었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응법을 속닥거려 본다.


대응법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저러다 죽겠지."라는 만트라다. 당신은 당신대로 그렇게 살다 죽고,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살다 죽겠거니. 직장생활이 길어질수록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제넘은 처사라는 걸 배우게 된다. 내가 옳은 만큼 그도 옳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옳음이 있기 마련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의 키를 내가 쥐고 흔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같은 점을 통과하는 직선 둘일 뿐이므로, 한치라도 다르다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며 서로 다른 목적지에 도착할 뿐이다. 그러니 이대로 당신은 당신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도 괜찮다. 어차피 죽을 거.


돌고 도는 커리어 고민, 파고들 것이냐 날아갈 것이냐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변화와 도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지난 회고 모임 때 이직을 열심히 준비하던 멤버가 이직 이후로 겪고 있는 하루하루의 챌린지들을 들으면서 그 작은 시간의 간격 사이에도 많은 성장을 이루셨다는 게 느껴졌다. 조직 이동을 준비 중인 멤버도 두 분이나 계셨다. 완전히 다른 업무로 전환을 준비하며 느끼고 계신 기대감과 긴장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나까지 설레었다. 손에 익은 일을 뒤로하고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준비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 모험심을 본받고 싶단 생각을 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근미래에 내가 마주할 변화를 그려보게 되었다. 우선 내년이면 새로운 대표와 부문장이 부임하면서 사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전통적 비즈니스인 데이터 아키텍처에서 그래프와 AI로 기술 중심이 크게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그 변화의 풍파를 먼발치에서 보게 되겠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은 가득하기에 회사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술 공부 방향을 살짝 조정해야겠다.


예정된 또 하나의 변화는 직급이다. 2026년은 나의 책임 승진 연차이기에, 차질 없이 승진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승진한다면 어떻게 책임이라는 직급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내년에도 지금 차세대 프로젝트에 잔류해서 남은 태스크인 이행과 튜닝에 대한 실무 경험을 이어서 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데이터 이행과 SQL 튜닝을 실제로 겪어보아야 데이터 모델링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깊이를 갖추게 될 것 같다.


Chin, chin


리사님의 사진

커리어에 대해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두면 어쩐지 딱딱하고 혹독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다 같이 많이 웃고, 떠들었다. 마르지 않았던 와인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일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꺼내 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 주고받고, 때맞추어 맞장구 쳐주며 동지애를 느꼈다. 접점이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몇 시간 만에 그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감탄하고,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문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재밌는 일 이야기를 꺼내 말하기를 꺼릴까? 어쩌면 일 이야기는 너무나 민감한 주제이기에 적당한 익명성과 거리감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대화에 굶주린 자들을 알아보는 J님의 예리함과 실행력 덕분에 즐거운 연말 밤이었다.





번외_J님의 책 선물이 남긴 세 가지의 질문


연말 모임에서 J님이 준비한 이벤트가 있었다. 럭키드로우 선물로 꽃과 와인과 책을 준비하셨는데, 운 좋게도 책을 받았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을 공유하고 싶어 택하신 선물인 만큼 얼른 읽고 싶어 재빨리 읽기 시작했다.

『실패를 통과하는 일』은 퍼블리 서비스를 만들었던 창업가 박소령이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끝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창업에 대한 경험도 꿈도 없지만, 일을 잘 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다. 내게 질문을 남긴 세 가지 파트를 소개한다.


(1) 나는 흥미를 느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가


제가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어떤 분야에서 정말로 뛰어나려면 반드시 강한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많은 일을 상당히 잘하는 수준까지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잘해낼 수 없죠.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저처럼 해야 할 겁니다. 즉, 가능한 한 강한 흥미를 느끼는 일을 쫓아야 합니다.
p.73, 박소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


데이터는 정말 흥미롭다. 데이터를 위한 모든 기술이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데이터가 유일하게 내게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란 사실이다. 난 세상이 흥미롭다. 이렇게 세상만사에 흥미를 느낀다면 무엇 하나에 탁월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2) 나는 같이 일하기 즐거운 사람인가


찰리 멍거는 젊은이들에게 커리어에 대한 세 가지 조언을 한다.
- 자신이 사지 않을 것을 팔지 않는다.
- 존경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지 않는다.
-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하고만 일한다.
p.119, 박소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


다른 조건들보다 강력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은 조언은, 마지막 조언이다. 입사 후 첫 면담을 기억한다. 사전 질의서의 질문 중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싶은 동료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내 답변은 "유머 감각이 있는 동료"였다. 주변을 살필 줄 알고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일하는 게 좋다는 부연과 함께.


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한다. 힘들어도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팀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나는 동료들에게 같이 일하기 즐거운 사람일까? 문득문득 욱하고 올라오는 나의 까칠함에 대해 생각한다. 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려면 아무래도 크게 노력해야겠지...


(3) 나는 어떤 태도의 사람인가


태도는 조직에서 선호하는 속성이 기준임. 그것은 조직마다 다르기 마련이라, 어떤 조직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는 태도가 어떤 조직에서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수도 있음. 나의 경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게 본 세 가지 속성이 겸손함, 성실함, 책임감이었음.
p.197, 박소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


동료들이 보는 나의 직장에서의 태도는 어떨까? 내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다정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도 동료로부터 쌉T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다정함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인간적인 따스함이 부족하단 생각을 자주 한다. 따스함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연말연시, 가까운 주변인들과 한 해를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보내는 연말은 또 얼마나 멋진지. 다시 한번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J님께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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