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들> 북클럽의 아프리카 세션의 첫 책
<보이지 않는 세계들> 북클럽의 아프리카 세션의 첫 책으로 응구기 와 시옹오(Ngugi Wa Thiong'o)의 『피의 꽃잎들Petals of Blood』를 읽었다.
응구기 와 시옹오는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거론될 정도로 현대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올해 5월 87세의 나이로 작고했지만, 생애 여러 소설을 집필하며 그가 겪었던 영국 식민 체제 하의 케냐와 광복 이후의 케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알린 작가다. 강제당한 언어였던 쓴 소설로 데뷔했지만 이후 아프리카 언어이자 그의 모국어인 기쿠유어로 작품활동을 하며, 문학을 매개로 한 해방 운동을 실천한 작가이다.
그는 2016년 제6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데, 동아일보와의 수상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쓰기의 동력으로 유년 시절 어머니와 이웃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꼽은 점이 인상 깊었다. 그는 케냐의 역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 처한 상황을 바꿔 나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았고 그것이 그의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피의 꽃잎들』에서 우리는 어떤 의지를 보게 될까?
소설 속 가장 큰 사건으로 일모로그 마을에 일어난 방화를 꼽을 수 있다. 이 불로 인해 권력자 세 명, 키메라와 추이, 음지고는 죽는다. 소설의 중심인물들이 용의자로 체포되고 심문받으며, 종국에 범인이 밝혀지며 끝이 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으로부터 처단된 세 명의 악인을 소개한다.
키메리아는 독립 운동가들을 배신했던 인물로, 막대한 부를 가진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는 완자를 성적으로 유린하고 그녀의 삶을 매춘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국가의 자원과 착취하고 여성을 도구화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인물이다.
과거에는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식자였으나, 나중에는 영국식 교육 시스템과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며 민중을 탄압하는 교육 관료가 된다. 그는 아프리카 전통과 사상, 언어를 파괴하고 서구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리인이다. 문화 식민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음지고는 학교 교장을 지내다 일모로그의 행정 관료가 되며, 지위를 이용해 지역민들의 땅을 갈취하고 일모로그 마을의 전통적 삶의 모습을 파괴한다. 그는 민중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며, 부패를 일삼는 행정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불씨는 당겨졌고, 집은 불탔으며, 악인은 죽었다. 이러한 방화와 처단이 새로운 케냐의 탄생을 앞당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 시옹오의 대답은 '글쎄'에 가까운 것 같다. 등장인물 카레가가 심문을 받으며 한 대사 한 조각을 소개한다.
"세 명의 경영진이 당신을 다소 편애하는 것으로 알려진 여자의 집에서 불에 타 죽었어요. 당신은 급료를 인상해 달라는 노조의…… 사무…… 총장이오."
"(...) 화나거나 슬픈 척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개인들을 제거해서 뭘 해결하겠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나라에 키메리아나 추이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설 것인가, 누군가에 밟힐 것인가의 양자 선택의 기로뿐인 자본주의의 세계관 속에서는 누군가의 제거로는 어떤 공백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누군가 제거된 자리는 대체인이 부상할 순간의 틈, 기회로 포착될 뿐이다. 빈자리는 대체자가 그 즉시 채운다. 결국 이 세계가 겪고 있는 착취의 문제는 개개인에 대한 보복과 척결로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화된 문제인 것이다.
함께 책을 읽었던 북클럽 멤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로 꼽았던 완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완자는 조용한 시골 마을 일모로그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다. 그녀는 여러 도시에서 여급 생활을 하며 전전하다 일모로그로 돌아온다. 완자가 그간 도시에서 겪은 모욕감과 고단함, 그로 인한 삶에 대한 권태감은 여러 대사에서 드러난다.
우리 여급들은 한 곳에만 머무는 법이 없어요. 때로는 주인과의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한 곳에서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지는 게 문제가 되기도 해요. 그럼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는 거죠. 새로운 곳에 가면 우습게도 남자들이 처녀로 취급해 주거든요.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여급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완자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건조하다. 새로운 여자, 처녀로써 받을 수 있는 잠시간의 환대를 위해 계속 떠돌아야 하는 삶에 대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완자를 통해 작가는 여성에게 지워지는 의무 세 가지를 드러낸다. 남편을 위한 의무, 자식을 위한 의무, 그리고 지주를 위한 의무. 그 시절 케냐의 여성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동네, 일모로그에서 농사를 짓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며 매춘부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평범한 여성으로 되돌아가, 아이의 엄마가 되는 삶을 꿈꾼다. 그녀가 일모로그에서 무엇보다도 찾고자 했던 건 인간성의 회복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요……. 인간으로…… 더 이상 모욕받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밟히지 않고……. 이해하겠어요?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여자가 되고, 이런저런 제약 없이…… 수치심 없이…… 인간이 되는 것 말이에요.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던 일모로그는 변화한다. 일모로그의 변화를 알리는 가장 큰 상징은 도로인데, 제대로 된 흙길도 없던 일모로그에 대도시로 이어지는 차도가 건설된다. 작고 조용하던 일모로그가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찾아 흘러들어온 객들로 넘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완자는 '먹을 것이냐 먹힐 것이냐'의 결정의 기로 앞에 서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녀의 선택은 소설에서 확인하시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녀의 선택은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적 구조가 연유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는 완자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착취의 폭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더 나아가서 케냐의 소시민들에게 부과되는 신식민주의의 구조적 착취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이러한 의견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목이, 카레라가 케냐인들의 처지를 '창녀'에 비유하는 씬이다.
우리는 모두 창녀입니다. 착취의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불평등과 불의의 구조 위에 세워진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일만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배불리 먹기만 하는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사람이 뉴욕이나 런던의 사무실에서,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가져간 수억 달러의 돈더미 위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뭘 먹고 뭘 읽고 뭘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창녀입니다.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내게는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였다. 자본주의 구조 아래에서 가장 경멸받고 유린당하는 것은 시장으로 내몰린 몸뚱이들이 아닌가.
시옹오의 이러한 서술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의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 속 가장 논쟁적인 엔사요, "말린체의 자식들Los hijos de la Malinche"를 떠오르게 한다.
말린체는 16세기 초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당시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z의 통역가이자 조력자였던 원주민 여성으로, 코르테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틴Martín을 낳으며 멕시코 역사에서 배신자와 피해자의 이중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열리고, 유린당하고, 조롱당한 어머니" 말린체의 자식들로 정의한다. 이를 위해 사용한 단어 라 칭가다La Chingada는 영어로는 Fucked에 가까운 단어로, 시옹오가 선택한 Prostituted와는 큰 차이가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단어 선택은 인격적 모독감이 짙다면 시옹오의 단어 선택은 자본적 갈취와 더 닿아있다. 공통점이라면 강요된 시스템 속에서 끼워넣어져 착취되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결국 『피의 꽃잎들』은 케냐의 정치적 변혁 속에서도 끈덕지게 이어지는 착취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유럽인들의 지배구조 하에서 방황하고 있는 케냐의 사회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시옹오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소설의 끝에 다 다르면 케냐를 바라보는 시옹오의 시각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카레가도 새로운 세계에 대해 얘기했다. 둘 다 바보였다. 다른 세계는 없었다. 이 세계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는 싸구려 셍게타를 마시며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이 세계에서 노래를 계속할 터였다.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다른 세계는 없지만,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고 노래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민음사, 2015.10.
김지영, 「케냐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 “나의 글쓰기 투쟁, 더 나은 세상 위한 것”」, 동아일보, 2016.09.2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921/803681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