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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Sep 18. 2021

프롤로그

점으로 산 인생, 밀린 점선 잇기 (1991-2021)

Self Portrait, 2021.05.

느슨한 마음의 어느 오후, 쌓인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쌓아둔 사진은 오만 장이 넘었더라.


대부분의 사진들은 출장 다니며 찍은 회의 사진과 풍경, 고양이들. 그리고 드문드문 내 사진들 몇 장 박혀있다. 사진 속 나는 매번 같은 얼굴.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표정과 차림새를 한 사진들을 보면서 맞아,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런저런 곳엘 갔었지. 추억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당시의 나는 어떤 일을 겪고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슬픔을 느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제대로 기념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얼굴만 남아있고 다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니, 묘하다. 


과연 사진 속 나는 누구였던 걸까. 지금의 나는 또 어떤 사람일까. 과연 내가 어떤 사람으로 흘러왔는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1. 파악과 아이디어


나는 한 번도 깨어 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거의 확신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게 실은 꿈을 꾸는 게 아닌지, 내가 꿈꾸는 게 실은 살아 있는 게 아닌지, 혹은 꿈과 삶이 뒤섞이고 교차하며 상호 침투한 결과 나의 의식적인 자아가 형성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삶에 충실하다가도 때로는 의구심이라는 이상한 감정이 엄습한다. 내가 과연 존재하는지, 혹시 내가 누군가의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나는 사실 어느 소설 속 인물이고 문체의 긴 파동을 타고 복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 속 현실 안에서 움직이는지도 모른다고,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본다.

285 page,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저, 오진영 역.


가끔씩 세상이 광막하게 느껴져 몹시 두려울 때가 있다. 우리의 앞-뒤-로 펼쳐진 시간의 아득함과 내 존재를 포용하고 있는 이 공간의 광활함. 시공간적 무한성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자니 내가 한없이 작아 아찔해지곤 한다. 나는 언제,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다. 이 인생에는 위치 감각도, 방향 감각도 없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길 잃었다고 해야 할까. 이 인생이 어떤 길 위에 놓인 것이 맞다면 말이다.


현재의 시간과 위치에 머무는, 그 순간적인 '나'를 규정해 놓을 수는 없을까. 잘 모르겠다.


앞을 내다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먼저 뒤를 돌아보지 않던가. 지난날들을 들여다보고 세어본다. 그러다가 퍼뜩, 아주 선명하게 알게 된다. 내 기억들은 점점이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점. 무게도 면적도 차지하지 못하는 점들로써. 점점이 부유하고 있는 기억들은 전후나 상관관계라는 연결 없이 이리저리 뒹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점들이 나는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진다.


총체적인 '나'를 파악해봐야 했다. 단출하지만.

(절차 1) 과거의 점들을 모아보고, (사건 나열해 보기)

(절차 2) 이 점들을 좀 더 살찌워 보고, (짧은 글쓰기)

(절차 3) 통통해진 점들로 실 짓기. (브런치로 모으기)


2. 사건 모으기


인생은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의 연속인데, 어떤 것을 '점'으로써 취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나에 관한 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열해 보기로 한다.


(정보 1) 사진첩

(정보 2) 여권 - 입국 스탬프

(정보 3) 개인 SNS - Facebook, Instagram

(정보 4) 노트 App - Evernote, Google Keep, Samsung Note

(정보 5) 이메일 - Gmail, 업무 메일

(정보 6) 메신저 - Kakao Talk, WhatsApp, Telegram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정보는 이렇게나 분산되어 있었다. 뿔뿔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디에 긁어모을 것인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글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프롤로그이면서 하나의 선언이 될 수 있겠다.


3. 선 긋기


나는 분산된 '나'를 모으고 싶다. 그리고 선으로- 면으로- 내어놓고 싶다. 


나를 둘러싼 사건들이 개별적이고 개연성이 없는 '점'으로써만 존재하는 지금, 점들을 이어내지 못해서는 경험이라는 '선'을 이루어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이 브런치가 나를 엮어 나가는 선형적 공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수줍고, 서투른 손 내밀기가 되더라도. 혼잣말이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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