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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Jan 01. 2022

모든 경험은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 없는 사회」

인스타그래머블한 사회에는 고통도 경험도 없다.

동남아시아에서 맞게 된 12월. 여기는 추위도 눈도 캐롤도 없다. 연말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는 12월. 이럴 연말을 축하하는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남은 연말을 보내보기로 하고, 고른 책이다. 한병철.

팜 슈거 라떼와 한병철의 「고통 없는 사회」

한병철의 이력은 감격스럽다.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프라이부르크대학과 뮌헨 대학원에서 철학과 독문학,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저작물은 독일어로 저술했다. 새 언어를 익혀 학문적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얼마나 유연한 사고,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가졌길래 성인 이후로 언어를 전환해 사용할 수 있는지 감탄스러울 뿐 아니라, 돌연 공학에서 철학과 문학, 신학으로 학문 영역을 뛰어넘은 것 또한 감탄스럽다. 물론 그의 개인적 삶이라 내가 감탄하고 말고 할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저작 중에서는 아래의 책들을 읽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타자의 추방」

「땅의 예찬」

「고통 없는 사회」


벌써 8권이나 읽었다니. 가장 좋았던 저술은 아무래도 대표작인 「피로사회」와 예술과 미학에 대해 다룬「아름다움의 구원」이다. 혹자는 그의 저작물이 자가복제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일관성을 가지고 여러 주제를 다루어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예로, 「피로사회」는 노동자, 「투명사회」는 디지털화, 「아름다움의 구원」은 예술, 「시간의 향기」는 사유, 「아름다움의 구원」은 예술, 「에로스의 종말」은 에로티시즘, 「타자의 추방」은 몰개성,「땅의 예찬」은 자연을 다룬다. 그의 주장에 한 번 감탄했다면, 다른 저작물을 읽어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다만, 「땅의 예찬」은 예외적으로 그가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쓴 에세이에 가까워서 다른 저작물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감정 심취 버전의 에세이 같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고통 없는 사회」에서는 무엇을 다루는가. 이 책에서는 고통을 거부하며 변화라는 생동감을 잃어가는 사회를 비판한다. 아니,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진통제를 택해 잠들어 있는 개인들을 깨우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공주님들은 이런 책을 읽을 리 만무하겠지.


고통 없이는 경험이 없다는 그의 말에 매우 동감한다. 신체와 같이 정신 또한 한계선이 있고, 한계 영역을 넘어서 새 영역에 발 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반복(또는 지속)과 스트레스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통사회

진통사회와 성과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고통은 약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성과와 병립할 수 없다.

나아가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Like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고통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증가하는 자상 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정신은 고통이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타자에 의해 건드려지는 것”12만이 삶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런 건드림이 없을 때 우리는 동일한 것의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

“줄곧 고통을 느끼고자 애쓰는” 영웅적 삶은 “단련Strählung”을 추구한다.

디지털 건강염려증Hypochondrie, 건강 앱 및 피트니스 앱을 통한 지속적인 자가측정은 삶을 하나의 기능으로 격하시킨다. 삶은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서사를 빼앗긴다. 이제 삶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것, 셀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행복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격정은 고통과 행복을 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


사랑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타자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로서 바로 할 수 있음을 할 수 없음Das Nicht-Können-Können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타자에 대한 공감적 관계인 사랑은 “우리를 덮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91 이에 반해 소비로서의 사랑은 어떤 상처도, 어떤 고통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통렬한 글이다. 우리가 편안한 생존을 위해 삶을 포기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연말에 본인의 한해를 반추해 보는 데 결정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2021년 한 해, 편안하셨는지요. 


하이데거를 읽고 나면 한병철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시간에 대한 관념 이해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평을 많이 보았다. 참고로, 한병철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하이데거를 연구했다고 한다.


내년 한 해의 독서는 올해처럼 쉽고 매끄럽지 않고 고통스럽기를. (➡관련 이야기_올해 읽은 책 74권_직장과 독서생활 병행하기)



인용문 출처

1.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 김영사,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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