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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 May 04. 2023

앙코르와트의 비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삶의 어떤 순간은 몇십 년이 지나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한다.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은 그날이 그렇다. 사라진 뒤에도 상이 나타나 맴도는 이야기.


다리 밑에 있다는 친모를 찾아, 괴나리봇짐 보자기 하나 없이 길을 나섰다. 결국 멀리 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향한 좁은 골목 안 남의 집 담벼락 아래 나름 머리카락이 보이게 꼭꼭 숨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반항일까? 어쩌면 작은 복수일까.


비가 오고 다시 마르길 반복하는 나라에서는 건물이 쉽게 무너진다는데,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그랬다. 나는 건물처럼 무너졌다.

예기치 못한 말. 비밀은 벽돌 틈 속에 불시착한다. 앙코르와트의 비밀처럼.

그날, 벽돌 틈 서랍에 비밀을 숨겨두었다.

그러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왜? 거듭된 실패 끝에 인공산을 쌓고 돌로 테두리를 둘러친 비밀 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반복하는 무너짐을 벽돌에 숨긴 그때부터 단단해지기로 결심했다.

착한 아이가 되기로!


어린아이의 눈에도 엄마의 삶은 고단했다.

행복하지 못한 엄마를 보며,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없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산다고 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위해 살았다.

착한 딸이라는 굴레에 갇혀, 지금도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포개진 감정들.


밥 먹는 게 가장 중한 집. 그건 내 육신이 사는 집이다.

음식에 대한 결핍은 요만치도 없다. 그런데 항상 밥 그 이상 무엇에는 굶주려 있다.

그것은 뭘까? 따뜻한 체온, 온도 높은 언어, 격려와 칭찬, 돌봄과 관심, 어쩌면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안정이다.

안정 없는 식탁은 착한 아이가 경험한 세계의 전부이자, 그 경험의 폭은 사각형 식탁에 그쳤다. 좁다란 폭, 앞으로 살아나갈 성향과 능력, 기질의 모습이 된다.




엄마는 김밥을 좋아한다. 꽤 좋아한다. 아니 많이 좋아한다. 나는 선호하는 음식은 아니다.

“왜 안 먹어?

“나 김밥 안 좋아하잖아!”

“먹지 마! 누가 박씨 아니랄까 봐”


정제되지 않는 언어를 매번 식은 밥과 함께 삼켰다.

성씨가 같은 아빠와 묶이면 밉상으로 전락했고, 잔병치레가 잦을 건 입이 짧은 탓이라 했다.


“너 먹으라고 매콤하게 오징어볶음 했어”

난 매콤만을 좋아할 뿐 오징어볶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힘들게 해놓으면 왜 안 먹어?”

사실 있는지도 몰랐다.

이쯤 되면 딸 사용설명서를 만들어줘야 하나?


음식의 풍요 속에 입이 짧은 탓도 있고, 거대한 음식량을 볼 때면 이미 배가 부르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버려지는 음식들을 보면, 마치 내가 받아야 될 형벌처럼 숨이 막힌다.


앙코르와트 벽돌 틈에 비밀을 숨긴 그날부터 진짜 친엄마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간이 딱 맞는 요리처럼 내게도 딱 맞는 엄마가 필요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위험한 감정이니까.

까닭 모를 쌀쌀맞음에 일찌감치 어른이 됐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바쁘고 그럴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린 모녀였고, 그 관계성 때문에 조화롭지 못해 충돌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상식과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믿음은 늘 어긋났다. 그 자리엔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했다.





학교에서는 일찌감치, 짝꿍으로 관계를 가르치고 쓸모나 가치 따위를 종이에 적게 한다.

부모님의 직업란을 적을 때마다 꼴깍 침을 삼켰다.

솔직하지 못해서 힘들었던 부모의 직업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다 자영업이라고 직업을 적지 못했다. 일종의 순수함?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양심? 이런 비슷한 게 있던 게 아닐까?


엄마는 미싱 실채기가 돌듯 일했다. 학교 앞 슈퍼는 날로 번창했고, 음식 솜씨가 좋아 동네에서 가장 큰 식당을 운영했다. 아빠 직업은 자주 변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할 일이 없어지면 엄마를 거들거나, 타박하거나, 집에 없었다.


결국 내가 목격한 시간과 장면은 지금까지도 존재감을 들어내는 약점이다.

부당함을 방관한 자, 희생을 요구하고, 강요한 아빠보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참아야 하는지, 내게 강한 나의 엄마가 말라빠진 한 사내에게 왜 이토록 나약한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더는 이해하기 싫었다. 테두리가 없는 집. 식탁만 존재하는 허기진 집에서 도망쳤다.


10년 넘게 주말이면 본가에 갔다. 금요일 퇴근 후 엄마 집으로 가면서, 이번 주는 웃으며 돌아와야지 다짐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매번 숙제하듯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안정되지 않는 호흡과 끝나지 않는 막막함의 연속. 결핍의 지속기간을 스스로 증폭시켰다.


인생 찬가를 그린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주인공 고현정과 고두심은 꼭 나와 엄마를 닮았다. 딸을 위해 희생한 엄마와, 그런 엄마의 희생을 바라보며 착함과 이기적임을 넘나드는 딸. 서로 할퀴고 싸우다가도 마음이 약해 보듬고 울고 웃고. 상호 모순되는 감정말이다.


엄마의 희생을 누구보다 아는 사람은 나다. 그걸 엄마가 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은 삼켰고, 착하려고 애썼다. 서로를 위하는 거라고 여기며 애를 쓴 날들이 곪아 터졌다.


이제야 조금 알겠다. 부당함 뒤에 숨은 작은 아빠와, 작은 아빠한테 마저 숨고 싶은 더 작은 엄마.

그 뒤엔 내가 커져야 했고, 강해야 했다.

내가 강해질수록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안도 희미해져갔다.

그제야 두 사람은 모두 늙어버렸다.


난 착하지 않다.

엄마에게 그동안 정말 힘들고 외로웠노라고 소리쳤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아랑곳하지 않음 이었다.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인지,

기억의 다(多)시점인 것인지,

내가 기억하는 순간을 정반대로 기억했다.

기가 막힌 운명의 수레바퀴다.


복제된 비밀은 진품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외마디 작은 시도에 귀 기울여줄 거라는 착각이었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입장이 있을 뿐이다.

엄마만의 문제도, 나만의 문제도 아니다.

정답이 없다. 단지 다를 뿐이라는 것.

엄마에게도 서랍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몇 개의 서랍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비밀은 서로가 다르고, 분명한 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폭은 좁아서 미워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착한 딸로 살지 않기로 했다.

허나, 발 뻗고 잘만큼 평안하진 못하다.

역시 나는 어설프게 착할 뿐, 다만 솔직해지리라.


미워할 수 없어 더 괴로운 모녀관계. 그것이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나라에 있는 건물이겠지. 그래도 쓰러지지 않는 앙코르 와트가 있듯, 나는 여전히 벽돌을 비밀스럽게 쌓아가며 나만에 앙코르 와트를 짓고 싶다.


한 번쯤 돌아봐야 했던 시간

후, 비밀이 숨을 쉰다.

앙코르와트에 있는 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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