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변명

포샤(Portia)의 항의편지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답장...

포샤(Portia)에게


지난번에 보내준 편지 잘 받았어요. 사실 나도 내가 창조한 등장인물에게서 400년이나 지나 편지를 받을 거라고 예상 못했기에 포샤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는 좀 놀랐어요. 난 맨 처음에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샤인 줄 알았는데, 줄리어스 시저 속의 포샤더군요... ㅎㅎ


포샤는 내가 창조한 희곡 작품 속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너무 제한적이라고 주장하는 거 같더라고요. 맞죠? 줄리어스 시저 속 여성 캐릭터가 2명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표했던데... 내가 거의 은퇴 직전에 쓴 템페스트(여자 출연자가 단 한 명)에 비하면 줄리어스 시저(브루터스의 아내 포샤와 줄리어스 시저의 아내 칼퍼니아 2명)는 그나마 좀 나은 편 아닌가요? (^_^;)...


워워워... 농담이었어요.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지 마세요. 알겠어요. 지금 포샤가 농담이 아니라 엄청나게 진지하다는 것을 나도 이해했어요..


자아.. 그럼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비겁한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내가 쓴 작품을 수백 년 동안이나 되풀이해서 상연하고,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할 줄 몰랐네요. 심지어 내가 창조한 연극 속 출연진의 성비까지 논란이 될 줄은 몰랐어요. 400년 후의 현대 세상에서는 이른바 '셀럽'이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인스타에 올리는 글 한 줄이 단번에 대중들의 가십거리(좋은 의미이건 나쁜 의미이건)가 된다고 들었는데... 그런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도 400년 전에 중학교나 간신히 졸업하고 대중 통속극이나 쓰던 나같은 평민 출신 극작가의 글을 이렇게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고맙네요...


자... 줄리어스 시저 연극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연극 속에서 여성들의 존재감과 역할이 좀 부족했다는 점은 내가 인정할게요. 하지만 몇 가지 사연이 있어요. 말하자면 내가 변명하고 싶은 내용이라고나 할까요?


첫째로, 배신과 암살이 난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주무대이다 보니 솔직히 남성 캐릭터들에게 초점이 많이 맞춰진 것은 사실이에요. 로마라는 공화국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 인간(줄리어스 시저)을 살해해야 말아야 하는 인간적인 갈등(주인공 브루터스)부터 시작해서 줄리어스 시저가 죽고 난 이후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투쟁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남성적인 서사만으로 작품이 가득 차 있다 보니 여성 캐릭터에 큰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어요.


둘째로, 이건 좀 약간 궁색한 변명이기는 하지만 내가 주로 활동하던 17세기 영국에서는 오직 남성만이 만이 연극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네요. 알다시피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어린 미소년들이 극 중 여성 캐릭터를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보니 이런 어린 미소년들이 나이가 지긋하고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를 가진 중년 여성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요. 젊은 여성들이라면 몰라도 중년 여성은 무리였죠. 제 연극 속에서 일관되게 '엄마'라는 존재가 부재하다고 포샤가 비판을 했던데, 사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싶네요.


셋째로,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는 그저 통속극을 쓰는 극작가 중 한 명에 불과했어요. 알다시피 줄리어스 시저라는 내 연극은 1599년 초연되었지요. 어느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60세가 넘는 여왕이 죽게 되면 그 뒤를 누가 이을지에 대한 추측과 논란이 영국 전체에 가득하던 시기였지요. 그러다 보니 권력 이 교체되는 시기에 대한 연극이 인기를 많이 끌 수밖에 없었고, 줄리어스 시저도 그런 시류에 편승한....


아. 뭐라고요? 다른 이야기 하지 말고 다시 요점으로 돌아가자고요? 알았어요.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 햄릿과 같은 고민과 광기로 가득 찬 남자 주인공에 필적할만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를 내 작품 속에서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고 전해 들었어요. 내가 쓴 작품들을 좀 돌아보니 그런 비판이 나온 이유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네요. 당장 리어왕만 하더라도 사랑하는 셋째 딸이 죽자 비통하고 격정적인 독백을 쏟아냈는데, 정작 안토니우스가 죽었는데도 클레오파트라는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내뱉지 않죠. 연극의 초반에 그야말로 연극 전체를 '멱살 잡고 하드 캐리' 하던 레이디 맥베스는 극의 후반부에서 맥없이 자살하고, 그 마저 남편(맥베스)의 대사 한두 마디가 그녀의 죽음을 관객들에게 알렸죠. 포샤 말대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가 좀 부족하긴 했네요.


포샤가 괜찮다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변명해도 될까요?


포샤가 내 변명을 듣고 마음에 들 가능성은 낮겠지만,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불과 며칠 만에 변신해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여주인공(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연극 햄릿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화신으로 나타났던 여인(오필리아)... 그들이라면 관습과 제도의 틀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기존의 틀을 깬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이런... 포샤의 얼굴 표정을 보니 내 변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요.


이젠 편지를 마무리할까 해요.


포샤가 400년 동안 참고 마음속에만 담고 있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해준 점은 고마워요. 그리고, 포샤가 원하는 수준의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한 점도 미안하고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400년 동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많이 상승해서 내 작품 속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바람직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 이 글을 읽은 포샤의 생각은 어때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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