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시저 속 포샤가 작가에게 쓴 편지…
작가님. 잘 지내시죠? 저 포샤(Portia)에요
네. 작가님이 쓰신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에 등장하는 주인공 브루터스의 아내 포샤에요. 본인이 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에게서 편지를 받게 되어서 좀 놀라셨나요? 저 역시 저를 창조하신 극작가분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제가 400년 넘게 마음속 깊이 꾹꾹 담아놓았던 이야기를 작가님께 꼭 털어놔야만 속이 풀릴 거 같네요..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작가님.
일단,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왜 이리도 제한적인지에 대해서 좀 따지고 싶네요. 혹시 작가님은 줄리어스 시저에 몇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지 아세요? 대사가 한 줄이라도 있는 등장인물을 모두 헤아리면 대충 50명은 됩니다. 그런데, 이 중에 여성 캐릭터가 몇 명인지 기억나세요? 400년도 넘은 과거에 쓴 작품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요? 작가님 비겁한 변명하지 마세요. 본인이 쓰셨는데 어떻게 기억을 못 하세요?
제가 알려드려요? 두 명이에요. 단 두 명... 저와 줄리어스 시저의 아내인 칼퍼니아(Calpurnia)...하아.. 참... 제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작가님? 아무리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이 작가님이 쓰신 작품 중에서 가장 정치적 색깔이 짙은 작품이고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았던 고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50대 2'라뇨... 이건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게다가, 등장인물이 2명뿐이면 대사량이라도 좀 많이 주셨어야죠... 줄리어스 시저 총 대사량이 19,703단어입니다. 어떻게 그걸 하나하나 다 세어 보았냐고요? 지옥불에서 400년 넘게 버티다 보니 하도 할 일이 없어서 헤아려 봤습니다. 그런데, 제 대사가 몇 단어인지 알기나 하세요? 꼴랑 700 단어 넘을까 말까에요. 아니, 제가 명색이 주인공(브루터스)의 아내인데, 이러실 수 있는 거예요? 그나마 겨우 200 단어가 넘어가는 칼퍼니아에 비하면 많은 편이니 만족해야 하는 건가요?
대사의 양뿐만 아니라 연극에서의 제 역할에 대해서도 솔직히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저도 이 연극의 내용은 잘 알아요. 위대한 조국 로마가 줄리어스 시저라는 독재자(I, ii, 136)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 남편인 브루터스를 포함해서 용감한 상원의원들이 선제적으로 그를 제거하는 내용(III, i, 77), 그리고 그 이후에 줄리어스 시저를 추종하는 세력과의 전투가 연극의 중심적인 줄거리죠. 하지만,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인 Cato 가문의 딸로 태어나(II, i, 295), 남자들 못지않게 강인하고 용맹한 제가(II, i, 296) 남편이 꾸미고 있는 줄리어스 시저의 살해 계획도 몰라서(II, i, 281)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려달라'라고 애걸복걸(II, i, 291)하는 모양새가 정말 처량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제가 남편한테 밥이나 해서 바치고 잠자리의 욕구나 풀어주는(II, i, 284), 창녀만도 못한 인간(II, i, 287) 취급받는 건 아닌지 자존심이 너무 상하네요.
그리고, 저의 죽음을 묘사한 작가님의 표현에도 불만이 많아요. 그저 꼴랑 '포샤가 죽었다'라는 제 남편의 대사 한 줄로(IV, iii, 147) 저의 처절한 고민과 끔찍한 자살 장면을 퉁치고 넘어가시다뇨... 저는 안토니우스의 대군에게 쫓기는 남편의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벌겋게 타오르는 석탄 덩어리를 삼켜서 자살했다고요!!! 솔직히 작가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13건의 자살 중에서 저의 자살만큼 드라마틱한 자살이 있나요?
철없는 사랑놀음 끝에 목숨을 끊은 그 두 아이들(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이 더 극적인가요? 아니면 한 남자를 놓고 동생과 싸우다 죄책감에 시달려 죽은 그 포악한 여자(리어왕의 딸 거너릴)가 더 드라마틱한가요? 남자 잘못 만나서 실성해서 죽은 여자(햄릿의 오필리아)의 죽음보다도 저의 죽음이 하찮은 죽음이었나요? 연극 무대에서 멋있게 죽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시던지, 그게 어려우면 죽은 시체라도 비장하게 보여주던지...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아내가 죽었다'라는 대사 한마디를 툭 내던지고 얼버무리다니요... 정말 작가님께 실망이네요.
아, 그리고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제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요... 작가님 작품 속에서는 단순히 여성 캐릭터뿐만 아니라 '어머니' 캐릭터도 부재하다는 사실이 상당히 마음에 걸립니다. 예를 들어보라고요? 어허, 작가님 이거 왜 이러세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만 해도 족히 10개는 됩니다. '템페스트'에서 미란다의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언제 죽은 거죠?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샤(저하고 동명이인이네요..)의 엄마는 또 어디 있죠? '네 멋대로 해라'에서 로잘린드와 그 형제자매의 엄마는 또 어디로 사라졌죠? '베로나의 두 신사'에서도 주인공의 어머니 이야기는 없고 주구장창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는 거 기억나세요? '한 여름밤의 꿈'에서 헤르미아의 엄마는 어디에 있나요? 귀찮아서 아예 그 캐릭터를 안 만든 건 아니세요? '오셀로'와 눈이 맞아서 데스데모나가 집을 도망 나올 때 엄마는 어디 있었나요? 어때요, 작가님... 계속 할까요?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가님이 '여성 혐오증'을 가진 분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좀 들기도 합니다. 뭐라고요? 작가님이 여성혐오증을 가진 게 아니라고요? 1600년대 영국의 분위기에서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기대하는 제가 잘못된 거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순종적인 비앙카에 대비되는 캐서린이라는 활달한 여성상도 작가님 본인 손으로 창조하셨잖아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했던 멕베스 부인도 멋있었잖아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용감하게 결혼했던 '심벌린' 속의 이모젠도 있었고요. 이 두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로잘린드(네 멋대로 해라)나 비올라(십이야)의 캐릭터도 나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이런 멋진 여성 캐릭터들을 좀 더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작가님...
400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길어졌네요.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작가님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새롭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점만 기억해주세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기억하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그 수 많은 캐릭터를 만드신 것만으로도 작가님은 대단하세요... 비록 여성 캐릭터에 대한 작가님의 배려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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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막, 장, 대사 라인은 shakespeare-navigator.com의 번호를 참조했습니다. 즉, (III, iii, 36)은 제3막 제3장의 36번째 줄의 대사를 의미합니다
* 그림 : 'The Suicide of Portia' on www.alam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