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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Apr 04. 2021

브런치 '보도 지침' 아니, '글쓰기 지침'...

직장 생활하는브런치 작가의 언론자유 쟁취(실패)의 기록...

* 보도지침 : 제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가 신문사와 방송사에 은밀하게 내려보냈던 세세한 언론 보도 가이드라인. 1985년 10월부터 약 10개월 동안 내려진 보도지침만 500개가 넘었으며 주로 '무슨 무슨 내용은 보도하지 마라', '무슨 무슨 내용은 축소해서 보도해라'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자마자 아내는 일찌감치 나에게 경고를 했다.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마. 성별 말고는 아무것도 쓰지 말라고. 알았지?'


아내의 직장 이야기, 나와 아내의 알콩달콩 연애와 티격태격 결혼 이야기가 나름 흥미진진한데... 쓰지 말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 내 글감의 대략 1/3 정도는 영구 봉인되었다.


아내는 한술 더 떠서 내 글을 읽지도 않겠단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고 내가 거기에 동의했으니 특별히 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쿨한 나의 아내... 구독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 나는 그냥 잠재 구독자 한 명을 잃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회사의 반응도 걱정이었다. 일 하라고 인도에 보내 놨더니 일은 안 하고 어설픈 작가 흉내 내고 있다는 소리 들을까 봐 걱정도 되었다. 아, 불쌍한 월급쟁이 신세여... 가장 속 편하고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회사명, 업종, 내가 주로 상대하는 거래 상대방 등등 내가 다니는 회사를 유추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언급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또다시 내 글감의 대략 1/3 정도가 날아갔다. 이제 1/3 남았다. 


다만, 내가 지금 인도에 근무 중인 사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내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의 맥락 자체가 설명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것만은 밝혀야 할 것 같다. 아.. 작가 프로필에서 이미 밝혔구나. ^_^;)


두 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아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자신과 친구들 이름을 모두 가명이나 별명으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들 이름까지 다 가명으로 바꿔달라는 거였다. 마지막 남아있는 글감 1/3 마저 놓칠 수는 없어서 그러겠다고 했다.(호비와 호지도 두 딸의 별명이다.) 그리고, 매번 글을 올릴 때마다 아이들에게 허락받겠다고도 내가 자청해서 약속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상처 주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언론의 자유를 포기했고, 그렇게 우리 집의 '보도지침' 아니, '글쓰기 지침'은 완성되었다.




브런치 '글쓰기 지침'(이라고 쓰고 '보도지침'이라고 읽는다)


1. 아내의 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않는다.

- 자기 성별은 써도 된다고 아내가 허락했으니 여기서 한 줄만 쓰고 지나가겠다. 울 와이프는 여성이다. 할. 많. 하. 않...


2. 내 회사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밝히지 않는다.

-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의 글을 봐도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대놓고 밝힌 분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혹시라도 본사의 준법 담당 부서에서 경고전화를 받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차단해야 할 테니까 :)


3. 아이들의 이야기는 써도 된다. 

- 청소년기 자녀를 키우는 양육자의 입장, 성장하는 자녀들의 동반자 입장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 아이들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학교에 대한 정보를 원하거나 또는 한국 교육이 아닌 다른 교육에 대한 정보 욕구를 가진 독자들에게 정보성 글도 제공한다. (국제학교 적응에 힘들어하는 주위의 한국 학생들을 보면서 아이들도 내심 안타까웠나 보다. 아이들도 적극 응원해주었다.)


4. 우리가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서 '생활하며 겪은 일'을 위주로 글을 쓴다.

- 우리 가족은 관광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한다. 가끔 관광지에 갔었던 경험을 쓸 수도 있겠지만, 갠지스 강이나 바라나시 같은 곳 하루 이틀 갔다 오고서는 이 세상의 철학을 다 깨우친 듯한 허세 가득한 글은 쓰지 않는다. 솔직히 그런 글 쓰기에는 내 필력이 많이 모자라기도 하고...

- 우리가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나라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쓴다. 문화적 차이를 어설프게 낭만화하지도 않기로 노력한다. 또한, 빈곤과 고통을 과장하는 ‘빈곤 포르노’ 같은 서사에 함몰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지금 이 글도 다 쓰고 두 딸에게 검사를 받은 글이다. 아이들이 발행해도 된단다.


작가의 가장 큰 적은 자기 검열... 작가가 자기 글을 검열하기 시작하면 작가로서의 인생은 끝난 거라던데. 나는 자기 검열은 물론이고, 아내 검열, 자식 검열, 회사 검열까지 다 마친 후에야 비로소 '발행' 버튼을 클릭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작가 인생은 시작도 못 해본 채 이미 끝나버린 거 같다 :(


이. 생. 작. 망.


가가 되는 거는 했나 보다..

///


p/s. 아내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는데, 이 글 역시 읽지 않겠단다. 뭐, 앞으로도 내가 쓴 글 읽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 사진 출처 : 글쓴이가 직접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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