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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Mar 29. 2021

Prologue (1) : 큰 딸의 폭탄선언

.... 우리는 어떻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가?...

오랜만에 우리 네 식구가 외식하는 자리에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첫째 딸 호비가 입을 열었다. 학교를 더 이상 다니기 싫으니 전학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전학 가고 있어", "나만 혼자 남겨지는  같아서 싫어"라는 말을 종종 입에 올리곤 했지만 우리 부부는 유심히 듣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한 학년이 끝나는 여름방학(그 당시 우리 아이들은 서초구 서래마을에 있는 서울프랑스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프랑스 학기는 9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7월에 끝난다)을 맞아 식구끼리 외식하는 자리에서 큰 딸이 마침내 지난 몇 달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 우리 한 번만 더 다른 나라 나가면 안 돼?"




2014년 초 내가 프랑스 지사로 발령나면서 우리 네 식구는 3년간 파리에서 생활을 했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초등학교 저학년 두 딸들은 그 3년의 기간 동안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나와 아내에게 큰 기쁨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빈번했던 야근과 회식이 없어진 덕분이었다. 또한, '예쁜 것', '맛있는 것', '멋진 것'에 있어서 항상 진심인 프랑스에 살면서 우리 가족, 특히 막 청소년기에 진입한 두 딸들은 그야말로 스펀지가 물감을 빨아들이듯 인생이 주는 행복과 환희를 온몸 가득 느끼고 있었다.


사실 나는 프랑스 지사로 발령받은 직후부터,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아이들을 계속 프랑스 교육 시스템 속에서 키워도 나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었다. 미국식 교육보다 조금은 더 엄격하지만 자유로운 사고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넘치도록 듬뿍 학생들에게 쏟아부어주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 서울에도 프랑스 학교가 두 곳이나 있었다.


하지만, '3년 후에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아이들을 계속 한국에 있는 프랑스학교에 보내는 게 어떨 것 같아?'라는 나의 질문에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 아이들은 한국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긴, 자기 자식이 외국학교를 전전하다가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고 프랑스어도 어중간하게 하면서 영어도 더듬거리는 '어설픈 이방인'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나도 더 이상 내 의견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 시간에 배운 엉성한 영어 실력 그리고, 봉쥬르와 봉수아르를 간신히 구별하는 불어 실력을 가진 아이들을 불어와 영어를 병용하는 'Ecole Bilangue(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중언어학교쯤 되겠다)'에 입학시켰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불어를 알아듣기나 하려나'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온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걸까? 3년의 기간 동안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학교에 적응하는 수준을 넘어서 어느덧 학교를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기가 끝나는 방학식 날, 두 아이들은 한껏 신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에 못 가서 심심하다', '빨리 개학이 되면 좋겠다', 심지어 '학교에 가면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 다 너무 재미있는데 왜 엄마와 아빠는 이렇게 재미가 없냐? 엄마와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사람이다'라는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입식 교육으로 시작해서 경쟁과 줄세우기를 거쳐 마지막에는 입시지옥으로 끝을 맺는 끔찍한 학창 시절을 경험했던 나와 내 아내에게는 행복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 학교가 재미있는 곳일 수 있구나"




2016년말, 귀국을 앞두고 이젠 오히려 아내가 아이들의 프랑스 학교 입학에 더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업료 수준이 걱정이었다. 또한, 그 학교는 이른바 '외국인 학교'라서 졸업해봤자 한국 교육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두 딸이 모두 '검정고시'를 봐야만 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우리나라처럼 학력과 학벌이 중요한 사회에서 그게 자칫 아이들에게 엄청난 낙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지난 3년간 직접 듣고, 보고, 겪은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프랑스에 있는 프랑스 학교에서 한국에 있는 프랑스 학교로의 전학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 배우는 교과과정이 대부분이 동일하다 보니 두 딸은 어려움 없이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했다. 선생님들은 친절하고 열정적이셨고, 학생들도 의젓하고 모범적이었다. 물론, 라틴어를 배우기 싫다고 버티는 첫째 딸을 어르고 달래서 라틴어 수업을 듣게 했다가 첫 한 학기 동안 내내 '아빠 때문에 이런 쓸모없는 죽은 언어를 배우느라 힘들어 죽겠어'라는 불평을 들은 것 하나만 빼고 말이다.(프랑스에 있는 학교에서는 라틴어를 안 가르쳤었다)


이렇게까지 새로운 학교를 좋아했던 아이들이었는데...




2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특히 첫째 딸의 마음이 조금씩 학교에서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사춘기의 지나가는 감정이려니 했다. 하지만 조금씩 커져가던 첫째 딸의 불만과 불안을 폭발시킨 것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다 떠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리디아라는 친구마저 조만간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리디아 아버지의 한국 근무기간이 거의 다 된 것이다.


가족들이 모인 외식 자리에서 첫째 딸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아빠. 내 모든 친구들이 다 떠났어. 다 떠났다고. 

이젠 나 혼자만 남은 거야. 

이럴 바엔 차라리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어. 도전해보고 싶다고. 

어차피 대학 가려면 좀 더 큰 학교에 가는 게 나을 테니까."




3년이나 4년이 지나면 인사발령을 받아 다른 나라로 떠나는 주재원들의 삶. 떠나는 우리는 남아 있게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지를 잘 몰랐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 우리 아이들이 서래마을 프랑스학교를 다니면서 이젠 우리가 '남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한국에서 잠시 근무하고 떠나는 주재원 자녀들이 대다수를 구성하는 학교를 다니다 보니, 붙박이로 학교를 다니는 호비에게는 매번 학기가 끝날 때마다 정든 친구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꽤나 힘든 일이었나 보다. 내가 떠날 때는 몰랐는데, 이제 남는 자의 슬픔을 알게된 것이다. 매번 학기가 끝날 때마다 크고 작은 마음고생을 했을 첫째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학교에 등교하던 날이 기억난다. 호비의 친구 중에 로렌이라고 갈색머리에 마음이 여려 보이는 프랑스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호비를 끌어안고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쭉 파리에 살며 그 학교를 계속 다닌 로렌은 말하자면 그 학교의 터줏대감 격이었다.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호비와 나 둘 다 살짝 당황했지만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어렴풋이나마 그때 왜 로렌이 그렇게도 슬피 울었는지 이해할 거 같다.


그 학교를 어릴 때부터 계속 다니며 너무나도 많은 이별을 겪다보니 그 어린 나이에도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반복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게 이별인데, 로렌은 그때 호비를 떠나보내며 또다시 찾아온 이별의 시간을 슬퍼한 것은 아니었을까?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제는 호비가 그때의 로렌이 되었다. 새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나가는 친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붙박이 나무가 된 것이다. 땅에 박혀 꼼짝 못하는 자기 상황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도 모두 잠든 시간, 아내와 본격적인 상의를 시작했다. 만약 이 시점에 다시 해외근무를 지원한다면 아내의 휴직 문제는 물론이고, 언니 때문에 졸지에 전학가게 되는 둘째 딸 호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되는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민과 걱정, 망설임이 마치 폭풍우처럼 휩쓸고 지나간 육 개월 후...


우리 가족은 2020년 1월 인도 뉴델리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새로운 곳이 주는 설렘과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인 삶,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서의 삶, 정착해서 살고 있으나 그곳에 속하지는 않은 삶, 이방인의 언어가 24시간 나를 감싸는 삶,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닌 '왔다가 떠나는 사람'의 삶...


바로 그 삶이 3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한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인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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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우리가 파리를 떠난 후 K-pop 팬이 된 로렌은 엄마를 조르고 졸라 2019년에 잠시 서울을 방문했고 호비와도 재회했다. K-pop 팬들이 꼭 들른다는 유명한 성지들을 두루 방문했다고 한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돌을 찾아 그 먼 거리를 날아온 아이도 당돌했고, 그런 결정을 지지하고 여행길에 동행해준 엄마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썸네일 사진 출처 : 인도로 입국하던 비행기 안에서 호비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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