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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Mar 30. 2021

Prologue (2) : 코로나 시대의 우정

...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만나...

[# 1] 이별 편지


2019년 겨울...


우리 가족이 한국을 떠나기 전, 둘째 딸 호지가 친한 학교 친구들과 소박한 이별 파티를 한 곳은 아이들이 다니던 서래마을 프랑스학교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톰앤톰스 커피숍 서래마을점이었다. 파티가 끝날 즈음 갑작스럽게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출국 준비로 휴가를 하루 썼던 나는 오랜만에 호지를 태우러 학교 앞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친구들과 제법 긴 이별 인사를 나눈 호지가 차에 올라타려는데 그 옆에 서 있는 파비엔느가 나의 눈에 띄었다. 호지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 어머니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대만 사람이어서 불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아이였다.


"파비엔느. 집까지 태워다 줄게. 어서 타."

"감사합니다."


호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가장 친한 친구와 조금이나마 더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는 길에 빨간 불이 많았으면 좋겠다." 호지가 수줍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차 뒷자리에 앉은 호지와 파비엔느는 속닥속닥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비를 맞지 않고 집에 가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파비엔느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야속하게도 빨간불은 많지 않았다. 파비엔느는 호지의 양볼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백미러로 흘끔 쳐다보니 호지의 손에 예쁘게 접힌 편지가 들려있었다. 파비엔느가 쓴 이별 편지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호지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뒷자리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제법 큰 울음소리가 되었다. 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차창에 윈도 브러시 스치는 뽀드득 소리, 그리고 호지의 숨죽인 울음소리만이 차 안을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어설픈 위로에 오히려 호지가 어색해할까 봐 나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중2, 그것도 여중생에게 아빠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할거 같아서였다.


그 후, 나와 호지는 그 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뭐,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하지 않았다.


호지가 그린 자기 자신과 파비엔느


[# 2] 다음 주 일요일에 만나...


첫째 딸 호비가 한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자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나의 직장이나 아내의 직장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둘째 딸 호지였다. '언니의 고집 때문에 한국을 떠나게 되는 상황을 호지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지만, 오히려 무덤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호지를 보며 한편으로는 대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어차피 파비엔느도 내년 여름에 한국을 떠난다고 하더라고.

그냥 육 개월 먼저 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할래."


그리고, 2020년 1월... 우리 가족이 이곳 인도에 도착한 이후 호지에게는 중요한 일과가 하나 생겼다. 일요일 점심식사를 마치고 파비엔느와 줌을 통해서 화상통화를 하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각자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기라도 하듯 몇 시간이 지나도록 문 밖으로 영어와 불어, 그리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의 코로나 상황, 호지가 다녔던 서래마을 프랑스학교의 최근 상황을 호지와 파비엔느의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파비엔느 아버지의 한국 근무는 2020년 여름에 끝났고 싱가포르로 발령 났다. 파비엔느의 식구들이 싱가포르에 정착한 이후에도 화상통화는 당연히 계속되었다.


"아빠. 파비엔느는 싱가포르에 있는 미국 학교 안 가고, 프랑스 학교 가기로 했대."

"아빠. 파비엔느가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콧구멍에 면봉이 쑥 들어와서 너무 아팠대."

"아빠. 파비엔느가....."




새롭게 옮겨간 학교에 등교도 제대로 못해보고 몇 달째 온라인 수업만 받고 있던 파비엔느도 꽤나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둘의 줌 미팅은 계속되었다.


아침 일찍 같은 교실에서 만나 서로 대화하고 부대끼며 그렇게 긴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서도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아쉬워지는 게 학창 시절의 친구일 텐데..... 호지와 파비엔느의 육체는 작은 노트북 화면 속에 갇혀 있고, 이 둘 사이의 그리움과 아쉬움만이 전선을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왕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 둘의 우정은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일요일, 그리고 그다음 일요일에 다시 만날 때까지.....


"À dimanche prochain." (다음 주 일요일에 만나.)


* 썸네일 사진 출처 : 인도 입국일에 직접 찍은 공항 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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