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으로 어그로 좀 끌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닌 인도 이야기예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이 어떤 가상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나라에는 김 씨, 이씨, 박씨, 최씨 등 여러 흔한 성이 있고 이 사람들이 대충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나머지, 즉, 전체 인구의 30%는 특이한 성씨 예를 들어 '홍'씨, '윤'씨 등이 차지한다(그냥 예를 들어서 그렇다고 가정해보자는 거다. 참고로, 나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들 '홍'씨, '윤'씨 등 특이한 성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상위 계급'이라고 불리며, 이들이 정치, 경제, 언론계, 심지어 민간 NGO와 학계의 고위직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있다. 김씨, 이씨, 박씨, 최씨 등 평범한 필부필부들은 '하위 계급'이라 불리며, 이런 고위직에서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두 명 찾을 수 있을 뿐이며, 심한 경우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온 이 전통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크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나라가 어디이고 이 신분제도는 무엇일까?
독자분들도 감 잡으셨다시피 오늘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며 가장 많이 질문하지만, 인도인들조차 이 복잡하고 괴상한 "신분제도+계급제도"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하긴, 이 전근대적이고 비인간적인 계급제도가 뭐가 자랑스럽다고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외국인들에게 떠벌려가면서 설명해주겠는가? 수천년 된 힌두교의 종교적 전통과 가문의 직업을 물려받는 전통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 제도가 주는 각종 폐해에 대해서 쓰다 보면 아마도 수십, 수백 편의 글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카스트 제도가 미치는 정치 사회적 폐해에 대해서만 한정해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짧게 글을 써보고자 한다.
2012년. Ankita Aggarwal, Jean Dreze 그리고, Aashish Gupta라는 3명의 경제학자는 아주 단순하지만 재미있는 서베이를 실시했다. 인구가 약 150만명 가량 되는 알라하바드라는 도시(우타르 프라데시주 소재)의 주요 정부기관, 법원, 검찰, 산업협회, 노동조합, 학교 등등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그 기관이나 조직의 고위직 명단 중에서 소위 '상위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조사했다. (참고로, 인도인들은 상대방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상대의 카스트를 알아맞힐 수 있다. 예를 들어, Mishra, Desai, Mukherjee, Chatterjee, Acharya, Bhat, Rao, Sharma 등등의 성은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브라만의 성이다.)
그들이 찾아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우선, 이른바 상위 카스트(통상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등 상위 3개 카스트를 말함)가 우타르 프라데시 주의 경우 전체 인구의 약 21%(인도 전체 평균은 약 30% 내외로 추정)에 불과했는데, 정작 알라하바드 시의 법원, 경찰을 포함한 사법기관의 경우 고위직의 70%에서 심하면 거의 100%를 이들 '상위 카스트'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상위 카스트'에서도 가장 최상위에 속하는 카스트(우타르 프라데시 전체 인구의 약 10% 내외에 불과한)인 Brahmin과 Kayashta 계급의 비중도 조사했는데, 전체 고위직의 약 30%-60% 내외를 이들 최상위 계층이 차지하고 있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하위 카스트'는 아무리 용쓰는 재주를 부려도 절대로 '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는 반면, 고위직에는 대부분 '상위 카스트'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였다.
둘째로, 이렇게 상위 카스트가 고위직을 독점하는 현상은 법원이나 경찰과 같은 공공부문에서뿐만 아니라 민간 부문 즉, NGO, 변호사협회, 각종 노조 대표자, 언론사 등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거나 일부의 경우에는 공공부문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전체 인구의 10% 내외인 Brahmin과 Kayashta 계급이 변호사 협회 고위직의 약 70%, NGO 대표자의 50%, 노조 지도자의 약 60%, 언론사 고위직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이들은 밝혔다.
셋째로, 가장 우울한 소식은.... 이러한 상위 카스트의 권력 독점은 예술계, 심지어 대학교 학생회에서도 나타난다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는데, '상위 카스트'가 예술계와 대학교 학생회 대표자의 70%-90%를, 최상위 계급인 Brahmin과 Kayashta 계급은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였다. 어찌 보면 가장 자유롭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예술가 집단과 대학생 집단에서도 상위 카스트의 권력 독점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니, 이러한 상위 카스트의 권력 독점이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건재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도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런 '카스트를 기반으로 한 차별'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오히려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도 이러한 차별을 개선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카스트와 관련된 언급이 나오거나 하면 이미 사회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는 '상위 카스트' 계급에서 '에이... 인도 헌법에서도 카스트에 기반한 차별은 다 금지되었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카스트 이야기를 하나?'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카스트에 따른 폐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태도로 대응해야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만한 추가적인 대책이 논의되는 것을 아예 원천 차단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인도에 몇 년 살다가 귀국하는 주재원은 물론이고, 제법 오래 거주한 인도 교민들조차 주로 이러한 '상위 카스트'에 속한 기업인이나, 대학교수, 고위직 공무원들하고만 교류하다 보니 카스트 시스템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끼기 어렵다. 불가촉천민 계급은 고사하고 수드라 계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용직 노동자들과도 접촉할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한 설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거나 책에서 읽어보더라도 브라만 계급이 머리에 해당하고, 크샤트리아 계급이 어디에 해당한다는 둥의 수박 겉핥기식의 신화적 설명에 그치거나, 계급 차별을 기적적으로 이겨낸 극소수의 성공사례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도 인구 10명 중 무려 7명에 해당하는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 인도의 농촌지역에 살면서 수천 년의 차별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겪는 김씨, 이씨, 최씨, 박씨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뿌리 깊은 차별이 고쳐지지 않는 한, 과연 '홍'씨와 '윤'씨가 독점한 나라, 아직도 17세기의 전근대적인 신분제도에 발목 잡힌 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경제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 솔직히 의심스럽기는 하다.
///
* 자료 출처 : 'Caste and the Power Elite in Allahabad' by Ankita Aggarwal, Jean Drèze, Aashish Gupta, Economic & Political Weekly, Feb. 7, 2015., Vol.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