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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 Sep 30. 2019

나를 향한 발걸음, <걸>

SPFF 상영작 리뷰 <걸(Girl,2018)>


서울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만난 보석, 영화 <걸>이다.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이토록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영화가 있었을까.

차분하고도 치열한 라라의 이야기.





나는 시스젠더 여성이다. 신체의 성별과 정신의 성별이 달라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15살 라라. 살면서 단 한번도 그것에 대해 혼란을 겪어보지 못해서, 영화 <걸>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라라는 좋은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가졌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언제나 넌 이미 여자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 그녀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아빠부터 친척들까지 모두가 다정하다. 굳이 잔인한 사건들이나 인물들로 주인공을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없다.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는 배경은 라라의 내면 심리를 더 돋보이게 한다. 영화는 그 예민한 속내를 조심스럽게 파고든다. 작은 행동은 때때로 누군가에게 큰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배려는 또한 차별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괜찮냐는 물음이 답답하기도 하다. 모든 것이 잘되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자책하게 된다. 비슷한 감정에서 비롯하지만 조금씩 결이 다른 마음들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영화 스틸컷

성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라라가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녀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짐작한 아빠가 물었을때, 내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라고 말한 장면이 있다. 아빠는 그건 생각못해봤구나, 라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한다. 그녀가 여자이며, 신체로도 여성이 되고 싶다고 해서 남성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놓칠 수도 있는 부분을 다뤄줘서 좋았다. 여성이 되고 싶다는 것은 남성을 사랑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 <어바웃 레이>에서 주인공 레이에게 "그냥 레즈비언이 되면 안돼?" 같은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

앞서 말했듯 그 두가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

영화 스틸컷

나는 아마 라라를 전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살아온 삶이, 머릿속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그래서 글을 남기기가 더 조심스러워진다. 강렬한 장면이 마지막에 있는데, 특별히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님에도 잔상이 아주 오래 남았다.  감정선을 아주 잘 잡고있는 영화여서 더 그런가 싶기도 하고. 영화제마다 호평일색인 작품이라 개인적으로는 꼭 개봉했으면 좋겠다. 라라의 주변 사람들이 따뜻해서 다행이다. 여성으로 보이는 것에 확신이 없었던 라라. 열린 결말로 끝나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다.

다만 짧은 단발의 라라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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