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동화들의 원작에는 잔혹한 부분도 있다. 가끔 잔혹 동화- 이런 식으로 들어 본 적이 많을 테다. 이 영화는 그런 동화에, 약간의 냉정함과, 또 그리움을 담은 영화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못 들어본 사람은 없다는 이 영화.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올가을 재개봉했다. 보면 볼수록 역시,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작이다. 세상을 너무 알아버린 당신에게 딱 맞는 동화.
영화 스틸컷
포스터만을 보고 장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다! 영화는 고인이된 작가의 동상에서, 작가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작된다. 과거에 작가는 자신이 묵었던 호텔 주인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바로 이게 메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무슈 구스타브와 제로의 '사과를 든 소년'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아주 독특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주브로카 공화국부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루츠 성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과 배경은 전부 꾸며낸 이야기다. 공감할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관객들이 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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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배경들은 전부 거짓말이지만, 현실에서 오마주한 공간들이 있다. 시대적 배경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역사에도 걸쳐있다. 영화를 본 이후에 찾아본다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주인공의 이름 구스타브, 맞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곳곳에서 숨은그림찾기처럼 나타나는 클림트의 작품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랄프 파인즈가 연기하는 무슈 구스타브는 실제 클림트의 삶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여성 편력이나, 뭐 그런 것들에서. 개인적으로는 웨스 앤더슨의 무슈 구스타브가 더 매력 있고, 이중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를 본 당신들은 이 허영심 넘치고, 언제나 파나쉬 향수를 몸에 끼얹고 사는 '고급'하인 무슈 구스타브에게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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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능청스러운 전개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이 공간이 실재한다고 여기게 만든다. 또한, 의심이 가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짜여진 구성도 한몫한다. 감독은 영화 제작 당시 영화의 화면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영화의 타임라인이 바뀔 때마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사용했다. 비하인드를 몰라도, 당신은 분명히 좁혀졌다가 넓어지는 화면에서 무의식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영화는 액자 속의 액자 속의 액자식 구성이다. 자칫하면 중간에 놓칠 수도 있지만, 강박적인 대칭 구조와 화려한 색감의 대비가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하나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에 몰입했을 때, 갑작스레 트이는 화면과 함께 순식간에 이야기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한정된 시야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착각이 들곤 하는데, 이용시간은 끝나버리고, 다시 출발점에 휙. 하고 도착한다. 그리고는 아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시간마저 돌려버리는 것이다.
영화 스틸컷
영화 속 매력적인 인물 인기투표를 한다면 아마 이변 없이 랄프 파인즈가 1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동시대에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배우들의 시작을 보는 것이다. 영화 <레이디버드>를 본 사람이라면 아주 친숙한 두 명을 볼 수 있다. 극 중 시얼샤 로넌은 제로의 영원한 사랑, 아가사로, 루카스 헤지스는 주유소 청년으로 나온다. 배우들은 주인공이 아니라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루츠 성의 하녀로 나온 레아 세이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배우를 볼 수 있는데,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도 어디에서 한 번쯤 봤다 싶은 배우, 수많은 감독의 뮤즈 틸다 스윈튼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분장을 하고, 립스틱을 오버해서 바른 그녀는 완연한 부자 노인 그 자체다. 불안정하고 늙은 마담 D의 모습이 마치 본인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영화에서 그녀는 짧은 시간 등장하지만, 극 전체를 지휘하는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틸다 스윈튼이 아니면 누가 그걸 대체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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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조연들에 더해서, 구스타브와 제로는 그 중심을 잰걸음으로 바쁘게 걸어간다. 귀족적인 외모로 시종일관 고급스러운 말투와 몸짓을 구사하는 랄프 파인즈가 볼드모트를 연기한 배우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기합이 빡 들어간 로비 보이 토니 레볼로리는 후에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밉상 친구 플래시 톰슨을 연기한다. 그 또한 쉽게 매치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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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그 이름, 멘들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미장센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메타포가 있는 영화지만, 굳이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많은 부분을 맡기고 있다. 관객이 보는 대로, 해석을 맡기는 것이다. 실재 인물들을 대조해서 보는 관점도 있고, 독일의 나치즘과 관련한 해석도 있다. 그건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드미트리가 구스타브에게 쏟아내는 폭언과, 사과를 든 소년이 있던 자리에 걸려있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이 곧 부서지는 것까지. 당신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분명히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완벽한 대칭에서 오는 이유 모를 불편함,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잔인한 장면이라든지. 이 예쁜 동화가 묻어놓은 현실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여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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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생각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물론 어느 구석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품고 있지만, 케이크 상자처럼 사랑스러운 영화다. 다양한 이야기들 가운데 본질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들 사이에 달콤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Z to A. 이 흔한 언어가 이토록 간질거릴 수 있다니.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러 왔을 때, 영화가 내 시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 오늘 영화 잘 봤네,"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엔딩크레딧까지 감독의 섬세함에 웃음이 나오는 영화다. 4년 전의 작품이지만 전혀 시간의 흐름을 찾아 볼 수 없다. 동화는 오래되어도 고전이라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보지 않은 당신, 가슴 어딘가 남아있는 그리움이 떠오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