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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18. 2022

가족이랑은 여행 가는 거 아니야

제주살이 30일차 2022년 8월 30일

혈육과의 여행 이틀 차. 오늘은 제주시내에서 벗어나 우도로 이동하는 날이다. 갈 길이 멀어 일찍 일어났는데 나보다도 먼저 일어난 혈육이 준비를 다 하고도 체크아웃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하냐고 물어보니 근처에 영업 중인 비건 식당을 찾고 있다고 하였다. 오전 9시 이전에 문을 여는 비건 식당이라... 그런 곳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찾기 드문 곳이었다. 그렇게 찾고 찾고 찾다가 이동 동선 중간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1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가서 맛있게 먹은 해장국집은(육수 대신 채수를 쓰셔서 버섯만 들어가는 비건 옵션이 있다.) 해장국집답게 아침 7시부터 운영하는 곳이었다. 허탈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우도로 향했다. 나는 우도에서 (1) 바다 수영하기, (2) 전기차 운전하기, (3) 맛있는 땅콩 아이스크림 먹기를 하고 싶었다. 혈육도 나의 계획에 동의를 해서 우리는 먼저 바다 수영을 위해 항구에서 가까운 해변을 찾았다. 우도 산호해변은 작은 해변이라 옷을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탈의실을 대체할만한 것은 길가에 놓인 공중화장실뿐이었다. 야외라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지저분한, 하지만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정도의 청결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야외의 공중화장실도 이 정도로 관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놀라워하며 거리낌 없이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혈육은 화장실에 들어가기조차 싫다고 하였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내가 "별로 안 더러워. 그냥 들어가서 후딱 갈아입어!"라고 말했다. 혈육은 "싫어. 들어가서 갈아입을 바에야 그냥 여기 밖에서 갈아입을래."라고 하였다. 결국 혈육은 중고등학생 때 터득한 '교실에서 체육복 갈아입기' 스킬로 화장실 밖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혼자서 미국 여행을 갔을 때 LA에서 한국인 동행을 구해 하루 동안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동갑인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금세 친해져 참 잘 놀러 다녔지만 나는 동행친구에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 친구는 집 밖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며 내가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올 동안(내가 좀 더 많이 먹긴 했지.)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숙소, 백화점 등의 검증된(?) 화장실만 이용하는 듯하였다. 하루 종일 잘 참던 친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아이스크림에 눈이 멀어 들린 마트에서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화장실 비밀번호가 적힌 영수증을 들고 발을 동동 거리며 마트 화장실로 뛰어가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의 혈육이 그 '아무 화장실이나 가기 싫어하는 샌님'이었다니. 충격이었다.


화장실 앞에서의 실랑이 이후 우도 여행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전기차를 빌리고 있는 와중에 소나기까지 내려 기분이 더 잡채스러워졌다. 아무리 코딱지 만한 전기차(라 쓰고 전기스쿠터라 읽으면 됩니다.)지만 운전은 처음인 내가 비 오는 날에 운전을 하는 게 맞나 싶었다. 다행히 비가 조금씩 멎었다. 우리는 멋 대신 생존을 택해 뚜껑 달린 전기차를 빌려 우도를 한 바퀴 돌았다. 혈육과 "안전제일!"을 외치며 운전해서 위험한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 수영을 하고 나서인지 운전하는 내내 피곤해서 달리는 기분을 만끽하지 못하였다. 땅콩 아이스크림도 유명한 곳으로 찾아가서 먹었는데 일전에 세화에서 먹은 땅콩 셰이크보다 못해서 너무 실망스러웠다.


어찌저찌 하고 싶은 걸 다 한 나는 그 모든 걸 다 했음에도 기분이 좋지 못했다. 친구랑 여행 오면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어도 재밌기만 한데 혈육이랑 와서 그렇다고 생각이 맺혔다. 그래서 혈육에게 성질을 부렸다. 그러자 혈육이 "너는 꼭 모든 걸 다 해야 해?"라며 되받아쳤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아는 사람이다. '된장이면 좋고 똥이면 빨리 뱉어야지 뭐 어쩌겠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그렇게 살면서 무수히 많은 똥을 먹었다고 한다.) 혈육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면밀히 살피고 여기저기 정보를 찾고 된장이라는 확신이 90% 이상이 되면 나에게 시키고 확신이 99% 이상은 되어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아무리 한 배에서 나왔다고 한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걸 이번 여행을 통해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이번 여행이 혈육과 나, 둘이만 가는 첫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혈육이 예약한 취다선 리조트에서 묵었다.(가고 싶은 곳 없다더니 있긴 있었네.) 우도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했으니 취다선에서는 혈육이 하고 싶은 것에 딴지 걸지 않고 동참하였다. 제주 여행에 흥미가 없어 보였던 혈육은 취다선에 오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리조트의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혈육이 집순이라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스타일이 다를 뿐이구나 싶었다. 숙소는 잠자고 씻는 곳인 나와 달리 혈육은 여행 와서도 숙소에 콕 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취다선은 명상객을 위한 숙소라서 방 내부에서도 조용히 말해야 한다고 하여서 데시벨에 신경 쓰며 말을 하였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다도 체험도 하였다. 대화는 자제하고 오롯이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였다. 방은 어제 묵었던 곳보다 방 크기가 1/2로 줄었지만 룸 컨디션이 어제 묵었던 곳보다 훨씬 좋았다. 저녁 시간에 어디 안 나가고 숙소에만 있으니 시간이 남아서 요가도 하였다. 또 시간이 남아서 책을 읽었다. 또또 시간이 남아서 혈육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혈육이 원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존의 나처럼 너무 많은 할 일을 계획해서 시간에 쫓기며 놀기보다 차분히 앉아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얻은 오늘의 교훈

혈육과는 호캉스를!

엄마에게는 패키지를!


먹고 살기 빠듯한 지금은 가족이랑은 여행 가는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안전제일! 비 오는 날 초보자에겐 시속 30km가 적당하죠^^*
숙소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만화책도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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