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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20. 2022

정신과 상담 대신 가족과 여행을 왔다

제주살이 31일차 2022년 8월 31일

혈육이 제주도로 오기 전에 한 영상 통화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못난 속내를 가족들에게 보였었다. 그날은 시작일 뿐이었다. 평생을 묵혀 온 감정들과 고민들은 봇물 터지듯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혈육과의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 그림 같이 아름다운 함덕 해변가 앞에서 우리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약간의 용기를 내보았다. 너무 무거워 목구멍으로 올려 보내기도 힘든 말들을 입을 벌리고 천천히, 한 단어씩 내뱉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슬픈 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서 울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스스로 과거에 발목이 묶여 있다는 걸 알아챘는데 그걸 푸는 방법을 몰라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육은 어느 순간부터 나와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제주도로 혈육을 부른 것은 과거의 늪에 빠져 꼼짝 못 하는 나를 구해달라는 S.O.S였다. 나는 "원래 제주도에서 심리상담을 받아 볼까 했는데 너무 비싸기도 하고 예약이 밀려 있더라. 그래서 00이 보고 자꾸 놀러 오라고 한 거야. 어차피 내 문제의 근원은 가족인데 그걸 돈 주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털어놓는 것보다 그 돈으로 00이랑 여행하면서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라고 하였다. 혈육은 본인도 그걸 알아서 온 거라고 하였다.


혈육과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우리의 유전자 반쪽을 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우리 아빠는 볼드모트여서 사는 내내 그 자의 이름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조차 없었다. 얼마나 말을 안 꺼냈으면 나는 '아빠'라는 단어조차 너무 어색해서 '부모님'이라고 대신 말하는 버릇이 있을 정도다. 가족이란 뭘까. 내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 그래서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사회 집단에 대한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가족들은 왜 꼭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이 함께 있는 건지(이것도 요즘은 많이 나아진 듯 하지만). 그놈의 비교병 때문에 나는 우리 가족의 구성이 남들과 다른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었다.


혈육과 나는 피서객 무리와 동떨어진 곳에서 에메랄드빛 바닷가를 바라보고 앉았다. 그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낙인이 찍힐까 봐 꽁꽁 감추어 두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얼마나 숨겼으면 심지어는 가족끼리도 터놓고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우리는 한 가족에서 아빠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로 각자 견뎌야만 했던 시간들을 털어놓았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낌새가 보이면 다들 회피하고 대화 주제를 바꾸곤 하였다. 이제는 이 주제를 가지고도 마냥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고 감정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혈육과 내가 전과 달리 성장한 것이 느껴졌다.



나와 혈육은 평생을 한 지붕 아래서 살았는데 단 둘이 여행 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도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자주 다투고, 약간의 화해를 하고, 다시 싸우고, 기다려주고, 배려하였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혈육과 나는 여행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썩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다. 2박 3일이 길다고 느껴졌으니 오죽할까. 그러나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나에게 꼭 필요한 여행이었다. 이전까지 나에게 가족이란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가족의 의미가 집이라는 공간을 너머, 내가 어디에 있든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리조트에서 진행하는 명상&요가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나도 취다선 리조트 이후로 돈 쓰는 맛을 알아버렸다.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 나에게 혈육이 보낸 문자. 그러네. 내가 요즘 플랭크를 안 해서 그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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