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에는 내가 규정 지은 일명 ‘노량진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선 옷스타일부터 말하자면 몸을 압박하는 그 어떤 천 쪼가리도 용납할 수 없다. 완전한 오버사이즈의 상의와 헐렁헐렁한 고무줄 바지가 디폴트다. 소화불량과 하체부종을 달고 살았던 나에게 의상은 더더욱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압박이 느껴지는 옷을 입은 날은 컨디션 난조로 직결되었다. 욱여넣은 음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궁금하지도 않은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빵빵해진 아랫배를 구겨서 앉아있자면 온갖 독이 뱃속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이런 증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편안한 의상은 필수였다. 그리고 계절을 잊은 스타일 또한 함께 간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독서실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대체로 낮은 온도로 유지되어 하루종일 실내 에어컨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인지라 긴팔 상의는 꼭 구비해놓아야 했다. 실제로 여름의 노량진을 살펴보면 꽤나 두툼한 긴팔 상의를 걸치거나 담요로 몸을 감싸고 밖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빠질 수 없는 백팩. 실제로 이 시기에 이놈의 백팩 때문에 내 키가 0.5센티는 줄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끝내고 부족한 공부 시간은 집에서 채워야 했기에 챙겨갈 것들이 나름 많았다. 일단 과목마다 기본서 두께가 엄청나고 (분권화를 한다 해도 가볍지 않다.) 문제만 푼다 해도 오답 복습까지 완벽하게 끝내려면 기본서도 필요했다. 물론 내 염려증 때문에 짐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갑자기 생각 안나는 부분이 있으면 어떡하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 때문에 한 권 두 권 챙기다 보면 이건 무슨 오버 보태서 행군 떠나는 군인의 짐만큼 늘어나있었다. 어깨가 빠지게 둘러메고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오고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가져온 책들을 한 번도 안 펼쳐보고 다시 그대로 가져가는 경우도 잦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하게 공부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노량진룩은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작업복 같은 것이었다. 마치 밭일을 위해 편하고 헐렁한 몸빼바지와 햇볕을 가리기 위한 쿨토시, 마스크선캡으로 무장하는 것처럼 멋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목적에만 충실한 그런 스타일 말이다. 노량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수험생과 비수험생을 구분하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이 바로 룩이다. 간혹 노량진룩 범주에서 벗어난 스타일에 공시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럴 때면 마치 위법을 저지른 사람 보듯 하며 그 사람의 올해 불합격을 점쳐보곤 했다. (물론 멋지게 차려입고 공부하면서 합격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럽다.) 아주아주 쓸데없는 남 걱정이었다.
이렇게 구분이 명확한 복장이라는 점은 다른 말로 노량진을 벗어난 곳에서 내가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뜻과 같았다. 대학교까지 졸업한 지 꽤 지난 나이대의 사람이 집복같이 헐렁한 차림에 몸뚱이만 한 백팩을 메고 평일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 흔하지 않은 일이긴 하다. 대학생 시절에는 모 연예인이 바르고 나와서 핫해진 립스틱이 무엇인지 발색이 잘 되는 블러셔는 어떤 것인지 그 시절의 유행 아이템을 꿰고 있었다. 학생이 바르기엔 비싼 축에 속하는 백화점 화장품 브랜드들에서도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한두 개씩 사곤 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한 달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화장품을 산다는 것은 사치의 사치였다. 물론 그럴 돈도 없거니와. 그나마 예전에 쓰던 화장품도 유통기한을 훨씬 넘겨버린 지 오래여서 어쩌다 한 번씩 나가는 외출 때마다 고민이 들었지만 새로 사는 것보다는 묵은 화장품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그마저도 사회인처럼 보이는 구색만 갖춘 정도였다.
공시생 시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사촌동생과 수험 시기가 겹쳐 같은 독서실을 다니면서 함께 공부했었다. 둘 다 먹을 것을 너무 좋아해서 가끔씩 노량진 밖으로 식사하러 나가곤 했는데 (역시 불합격엔 이유가 있다.) 유일한 일탈이면서 이렇게라도 스트레스 해소를 해야지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겠냐는 뭐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둘이 세트로 다니는 날에는 행색이 딱 ‘도를 아십니까’ 같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머리 질끈 동여매고 가방 끈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었다. 길바닥에서 서로 “인상이 좋아 보이세요.” “덕이 많아 보이세요.”라고 주고받으면서 깔깔대고 웃었던 적이 많았는데 장난 빼고도 객관적으로 정말 그래 보였다. 노량진에서는 튈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번화가로 간다면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이질감으로 잔뜩 튀었다.
실용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알맞은 차림새였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만 아니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언젠가 엄마가 이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또래 애들은 사회생활 하면서 번 돈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다니는데 한창 예쁠 나이에 그런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는 게 얼마나 가슴 답답했는지. 아침마다 현관에서 무게 때문에 축 늘어진 백팩을 메고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나를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초라한 내 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힘들었을 엄마 마음 때문에 괜찮지가 않았다. 매일매일을 불효를 저지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