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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기동 일인가구 Sep 01. 2018

냉장고 고치던 날

 며칠 전 냉장고가 갑자기 고장 났다. 엄밀히 따지면 갑자기는 아니고, 서서히 고장 나고 있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를 어느 순간부터 하루가 다르게 냉기가 약해져만 가는 걸 확연히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라 참기 힘들 정도의 이상한 소음이 냉동실에서 꾸준히 새어 나왔다. 신축 건물 새 냉장고가 뭐 벌써 이러냐며 지레 화가 났다. 서비스센터 웹사이트에 누가 봐도 아, 이 사람이 굉장히 짜증 났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어투로 써 가며 급히 접수한 A/S도 방문까진 또 며칠이 걸린다는 걸 알고 혼자 또 방향도 못 찾는 화를 냈다. 벌써 한참 전에 많이 사뒀다가 닝닝한 맛에 여태 다 못 먹고 두 개 남은 아보카도가 냉장실 안에서 상한 걸 봤을 때, 이러다간 남은 음식들의 파국을 보겠구나 싶었는데 달리 어찌할 방법은 없고 마음만 급했다. 



방문 약속이 잡힌 날. 점심때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리 기사겠구나.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있으니 예정 시간보다 빨리 10분 정도 후에 방문해도 되겠냐 물으셨고, 그러시라 했다.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경우였다. 돈을 드려야 하나? 원래 출장비를 받았었나? 카드는 당연히 안 되겠지? 밑에 편의점에서 현금 좀 뽑아 와야 하나? 그럼 얼마 정도지? 보통 이런 분들 오면 마실 거라도 한 잔씩 드리던데. 아 젠장 컵을 어느 서랍에 뒀더라. 혼자 사는 남자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 역시 평소에 컵이란 걸 도통 쓰질 않았다. 



빨랫감을 적당히 치우며 고민들을 끝내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LG 로고가 새겨진 이 날씨에 입고 있기 버거워 보이는 조끼를 입고, 친절한 인상을 한 얼굴 까만 수리 기사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아 네 안녕하세요." 


고객님 소리 참 오랜만에 듣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것도 아닌데.  


"소음이 심하네요." 


전문가 아니시랄까 봐, 바로 아시는 것 봐. 어쨌든 믿음은 갔다. 


"지금 냉동실 냉장실이 다 시원하질 않거든요. 원래는 이게 너무 꽝꽝 얼 만큼 차가운 게 문제일 정도였는데 지금 이거 보시면 아이스팩인데 얼지도 않고 그냥 물이거든요."  


"음.. 서리가 너무 많이 끼었는데.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얼었지. 물 좀 냄비에 많이 떠다 주실래요." 


유난히 그런 사람들만 봐 왔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대부분의 수리 기사들은 원래 저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어디 하나씩 문제가 있는 기계들을 과격하게 만졌다.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건지, 비슷한 작업을 수백 번은 해서 타성에 젖어 그런 건지 아무튼 항상 그랬다. 그만큼 빠르긴 했지만. 뭐, 어디가 더 부러지거나 하지만 않으면 빨리 되는 게 나쁠게 뭐가 있나. 나도 빨리 이 귀찮은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 



이분은 좀 달랐다. 드라이버 돌리는 것도 조심조심, 부품 하나 빼는 것도 조심조심. 갓난아기들 만지는 풋내기 의사 손길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오 젠장, 냉동실 뒤쪽 판을 뜯어내니 몇 가지 회로며, 계속 돌아가는 프로펠러며 하는 원리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죄다 얼어 있었다. 각종 창의적인 방법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재난영화들 중에서 빙하기로 망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 속에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라고 하면 적당했을 거다. 



우리 회사 제품이 이럴 리가 없다는 듯, 우리 회사 제품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듯, 아저씨는 작게 한숨부터 쉬고 시작하셨다.  


"이게 냉동실에 뭐를 너무 빼곡하게 쌓아두니까 냉기 빠져나오는 구멍들을 다 막아서 그런 거예요." 


"아 네네." 


아, 꼭 이런 건 무안하게 내 잘못이더라.  


"그러니까 안에서부터 꽝꽝 얼고 밑에 냉장실로는 차가운 게 가질 않고 그렇게 되는 거죠." 


대기업 CS 팀이 만든 촘촘한 매뉴얼 덕택이겠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수리 기사 아저씨는 원래부터 굉장히 친절한 분이신 것 같았다. 표정을 못 숨기는 것만 빼면. 작업하는 내내 나긋나긋하고 친절하게 말했지만 난 순간 표정이 읽혔다. 그리고 그 표정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와 시발 이 노답새끼 어떻게 냉장고를 이딴 식으로 썼냐. 넌 존나 대단하다 진짜.' 


말은 친절하게 하시는데 나도 서비스업종 여러 가지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그 표정이 너무 읽혀서, 당장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훤해서 킥킥 새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저씨는 그리고 나서 가지고 온 물을 끓여 방사하는 것 같은 기계로 냉장고 전체를 천천히 녹여냈다.  


"한번 다 닦으시고 한 시간 정도 이대로 꺼 두세요. 한 시간 지나면 다시 코드 꼽으시고. 그럼 냉동실부터 다시 얼기 시작할 거예요. 냉동실이 다 얼고 나야 냉장실로 냉기가 가요." 


"아 네. 감사합니다." 


원래 그런 건지, 집주인이 구매한지 얼마 안 된 제품이라 그런 건지. 출장비는 없었다.  



누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수리 기사분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고 또 내게 한심함 반, 걱정 어린 마음 반으로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나도 얼마간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걸 무슨 아기 다루듯 하게 되더라. 기사님이 말했던 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전원을 꺼 두었다. 이참에 더 쉬어라. 전원을 꺼 둔 시간 내내 냉장고 전체에서 얼음 녹은 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이 더운 날 자기도 죽겠다는 듯 묵은 땀을 흘리는 것도 같고, 네가 다 잘못해놓고 그간 왜 나한테만 화냈냐며 억울함에 우는 것도 같아 바닥을 닦다 말고 떠오른 엉뚱한 상상에 혼자 피식하고 싱겁게 웃었다. 물이 금방 흥건해져 코드를 다시 꼽기 전 냉장고 안팎을 열심히 닦았다. 걸레 하나에, 수건을 두 개나, 두루마리 휴지를 세 롤이나 아낌없이 썼다.  



다시 켜 두고 몇 시간 나갔다 돌아오니, 소리는 멈췄고 냉장고는 차가워졌다. 집 안은 다시 편안하게 조용했다. 이젠 성가신 소리 안 들으며 자겠구나 싶어 씻고 누워 핸드폰 좀 만지다가 이제는 정말 자려고 화면을 껐다. 잠들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그저 하얀색 가전제품 하나를 앞에 두고 마치 무슨 네가 낳은 자식을 왜 이렇게 방치했냐고 안타깝게 질책하는 것 같은 기사 아저씨의 과하게 극적인 표정과 태도가 다시 생각나서 한번 더 피식 웃었다. 크... 아무리 봐도 그분은 정말 프로였어. 참 엔지니어시라니까.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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