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주는 대비가 선명하다. 바깥'은' 여름이다. 자연스레 안과 밖을 나누는 저마다의 경계 안쪽을 생각하게 된다. 바깥은 여름인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안쪽은 쓸쓸한 가을이거나 차가운 겨울일 테다.
횟수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을 살아감에 있어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쉽게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들 만큼 이별의 형태는 다양하고, 어디까지 이별의 영역에 포함해야 하는지 그 범주마저 혼란스럽지만 이별을 겪은 후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으로, 방해받지 않은 채 한동안 세상과는 유리되어 자신만의 슬픔에 온전히 잠길 수 있는 각자의 경계 안쪽으로 들어가고는 한다. 그때는 굳이 이해조차 바라지 않는다. 개인의 슬픔을 하나하나 들어주기엔 너무 큰 세상은, 무심하여 환한 바깥은 여름인데, 안쪽은 온통 차가운 겨울이다.
학교 선생님이던 남편을 사고로 잃은 명지는 사촌 언니의 제안에 한 달간 비어있게 될, 에딘버러에 있는 그녀의 집에 머물기로 한다. 에딘버러에서 그녀는 사고 이후의 삶을 그저 살아가며 슬픔을 삭여 간다. 무언가로부터의 이별은 그 결핍의 자국을 남기고는 한다. 명지의 몸에는 '피부 감기'라 불리는, 시간 밖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는 이별 그 자체의 성질과 닮은 반점들이 생긴다.
며칠 후, 에딘버러에 있다던 옛 친구 현석을 오랜만에 만나며 명지는 애써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남편 이야기를 꺼리는 그녀를 알아채고 혹시 헤어진 거냐 천진하게 묻는 그에게, 환한 바깥에 있는 현석에게 명지는 안쪽의 슬픔을 드러내지 못한다.
옛 감정이 있던 현석과 오래 술을 마신 그날, 명지의 몸에 있는 이별이 새긴 반점은 결국 현석과의 동침을 방해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이 구하고 죽었던 아이 누나의 편지를 받으며, 명지는 긴 슬픔의 칩거를 마무리한다. 한국까지 그녀를 따라온 반점 위엔 어느새 딱지가 앉았다.
이처럼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이별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정착이라는 맹목적인 결과를 위해 대출을 끼고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는 아이의 죽음에 의미가 바랬다. 노량진 수험생 신분으로 만나 경찰 공무원이 된 여자, 시험에 계속 떨어지다 급하게 취업한 후, 그마저도 그만두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는 남자. 이미 각자의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둘은 오래 미뤄 둔 이별을 성탄절에 마쳤다. 교수 임용 전화만을 기다리던 한 남자는 오래전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를 받지 못한다. 암에 걸린 자신의 반려견을 끝내 안락사시켜주지 못한 어린 소년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용서를 배운다.
소설은 이별이 가져온 상실과 슬픔의 극복을 재촉하지 않는다. 애써 위로하려 하지도 않는다. 미처 세상이 신경 쓰지 못한 이야기들. 문을 닫고 조용한 슬픔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삶을 그저 세심하게 지켜보며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준다. 결과의 기록이 아닌, 과정의 기록이다.
담담하게 슬픔을 적어내는 김애란 작가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자칫 신파로 이어질 수 있는 경계에서 균형을 잘 맞춰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유치원 통학버스 사고, 세월호, N포 세대 등 소설 밖 세상에 실재하는 비극들을 자연스레 녹여내는 방법 역시 인상적이다.
소설 맨 뒤 적혀 있는 짧은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