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소설을 한 편 읽고 싶었다. 책이란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야만 읽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책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읽는 게 지적 쾌락감을 주고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은 행복하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그러한 이유에서 꺼낸책이다. 그저 책의 제목이 재밌을 것 '같아서', 표지에 그려진 삽화가 재미있어 '보여서'.
소설의 작가인 뮈라셀 바르베리는 프랑스의 철학선생이자 소설가이다. 그녀는 「맛」이라는 소설로 이름을 알렸다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음식 비평가인 아르탱스이다. 그는 그르텔 7번지 아파트 5층에 사는 인물이다. 이 「맛」이라는 소설 속에는 아르탱스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입주민들이 등장한다. 각 층에는 각기 다른 직업과 성별,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만의 색을 가진 삶을 살아간다.
'르네'는 그르텔 7번가 아파트의 수위이다. 이 수위가 「맛」이라는 소설 속에서 던진 말 한마디가 「고슴도치의 우아함」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사실 「맛」을 읽어보지 못했다.) 작가인 뮈라셀 바르베리는 「맛」의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냈다. 「맛」에서 작가는 르네를 '수위답게' 보이려 애썼다.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수위라는 직업이 주는 이미지를 그려냈다. 작가는 르네를 지식이 얕고 게으르며 사회성이 부족한 인물로 표현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자수위의 이미지이기에. 이 르네의 모습에 편집자는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는 뮈라셀 바르베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르네의 대사는 너무 지극히 '수위' 같은데요? 당신은 소설가에요. 충분히 수위가 교양적이고 권위 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픽션을 만들수 있을거 같은데..."
이 말에 작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깨달았다. 원한다면 살인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만들수 있고 공상과학을 글로써 실현할 수 있다. 그녀는 '교양 있고 지적인 수위'라는 인물을 창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회적 통념에 모순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태어난 인물이 바로 「고슴도치의 우아함」속 '르네'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그르텔 7번지 아파트의 수위 '르네'와 6층에 사는 '팔로마'라는 소녀, 그리고 사망한 아르탱스 대신 (이런...「맛」을 스포했다.) 이사온 '가쿠로 오즈' 세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이 세 명의 주인공 중에 사회적 통념에 거부되지 않는 인물은 가쿠로 오즈 한명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이, 성별,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수위인 르네는 수위답지 않게 높은 지식 수준과 예술적 취미를 가졌다. 특히 그녀는 쉼표 하나에도 반응할 정도로 언어학에 대해 조예가 깊고 민감하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리나」의 첫문장을 외우고 있다. (아... 하필이면 「안나 카레리나」인가) 12살밖에 안되는 팔로마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높은 지식 수준을 자랑한다. 그녀는 사회적 통념에 저항하며, 철학적 사색을 즐기는 천재이다.
이 두 명의 '돌연변이'들은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 나이와 성별, 직업에 걸맞지 않는 그들의 본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가면을 착용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에게 걸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그들은 갈등을 피하려고 한다.
소설은 이렇게 자신을 꽁꽁 숨기려하던 르네의 본모습을 팔로마가 알게 되면서 전개 된다. 팔로마는 르네를 '우아한 고슴도치'라 부른다.
가시로 뒤덮혀 있어서 철옹성 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임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 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팔로마는 스스로를 또한 고슴도치라 부른다. 이 두 고슴도치들은 가쿠로 오즈라는 인물을 매개체로 소통하게 되고 서로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팔로마와 르네는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노출한다면 다른 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 단정한다. 그들은 당신들의 지적능력과 문화 취향은 이미 다른이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믿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나르시시트들은 타인의 문제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르네와 팔로마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컨트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삶들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계획과 잘 조종 되어진 행동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예를 르자면 팔로마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완벽한 논리에 의해 자살을 계획한다. (절대로 스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자살한다면 그녀의 가족들이 겪는 슬픔과 그 자살을 목격한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르네와 팔로마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살아간다. 직업과 나이, 성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거부감 없이 다가가도록 가면을 쓴다. 그들이 가면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가면을 쓰는 진정한 이유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가면을 썼을때 스스로가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가면을 썼기에 그들의 시선은 철저히 자신을 향한다. 자신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이고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취한다. 이 모습은 타인과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미 가면속에 자신을 감추었기때문에 진솔한 만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만큼 사회적 통념에 사로잡힌 사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각 나이에 걸맞는 역할과 임무를 정하고 그것을 기대하고 강요한다. 예를 들어, 10대에는 학교교육에 충실하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역할과 임무이다. 20대에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30대에는 가정을 이루고 착실히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것이다. 40대에는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고 10대 아이들을 잘 교육하여 그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임무와 목표이다. 이 돌고 도는 사회적 통념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고 속도에 뒤쳐지거나 빨라지면 비난 받는 모습이다. 그래서 조금 걸음이 빠른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진 고슴도치들은 자신의 가시를 감춘다. 그리고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은 결국 타인과의 진솔한 소통을 방해한다.
소설이 재미있어지는 부분은 이 가면이 철저히 벗겨지는 순간이다. 팔로마는 르네의 본모습을 알고야 만다.
르네가 자신과 같이 가면을 쓰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팔로마도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누군가 나의 본모습을 알아주고 그 또한 가면없이 나와 대화를 나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먼저 가면을 벗어주고 사회통념과 관계없이 가면 속 상대방의 모습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에게는 내가 행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