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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Oct 16. 2015

진화한 '중독성 Hazard'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 에쿠니 가오리

곧 익숙한 향기가 났다. 대학 시절 중앙 도서관에서 빌려 나오던 책에서 느꼈던 그것이었다. 그 곳에 있던 그녀의 소설은, 정말 대여 가능한 한 모조리 빌려다 읽었기 때문에 그녀만이 가진 독특한 문체가 뿜는 나이브함은 나를 곧 대학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그녀의 소설을 시험 기간 전공 서적 읽듯, 가히 집착에 가깝게 읽었던 그 시절.


순식간에 나의 '문학 시대'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에쿠니 가오리의 지난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이 작품은 어쩌면 예전에 한 번쯤 읽어봤음 직한 그녀의 소설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물론 어떤 작품의 속편도 아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명작'들은 이미  읽은 지 오래 되어 내용 자체는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누군가 "이 책이 이런 내용이야"라고 하면 기시감을 느낄 정도랄까. 그럼에도 '속편'이라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작품을 읽고 있을 당시  머릿속에 그렸던 상상이 비슷한 이미지를 품고 있어서다. 한국인인 독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일본스러운' 배경과 인물이지만 인물 사이의 관계나 이벤트를 보면 전혀 일본답지 않아 되려 깜짝 놀라게 되는, 에쿠니 가오리의 '장기(長技)'가 이번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이전 작품들이 마치 흑백톤으로 느껴질 만큼,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언밸런스'적인 풍성함을 자랑한다.


'일본스러운' 부분은 소설 전반을 감싸고 있는 배경과 인물의 성향이다. 가업을 세습하고 다소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이 짙게 깔려 있던 60~70년대 일본의 모습은 일본인 할아버지와 러시아인 할머니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소설 뒷부분에 가면 그것이 온전히 두 사람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음을 고백하긴 하지만) 키쿠노, 유리, 기리노스케 삼남매가 장성하면서 80~90년대는 전통적인 일본식 가치관과 젊은 세대들의 생각이 부딪히며 가족의 모습이 변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시공간적 배경이 나타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본의 어느 한 가족이 이렇게 살았겠구나 싶은 정도로 평이한 모습이다.


캐릭터 설정도 크게 파격적인 부분은 없다. (집안 자체만 보면 독특한 구상이지만) 이런 남매가 80년대를 앞둔 시점에 동네 한둘쯤은 있었을법하다. 여자이기에 허용되지 않았던 자유를 갈망했던 큰 딸이자 엄마 키쿠노, 예민한 성격에 외출조차도 꺼리는 내성적인 둘째 딸이자 이모인 유리, 누나 둘을 두고 막내 아들로 태어나 자기만의 패션 세계와 독신 철학을 가진 기리노스케, 이렇게 삼남매가 2세대의 축이다. 네 명이나 되는 3세대 역시 별난 캐릭터들은 아닌 듯하다. 그 시대 일본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 같은, '고만고만한' 노조미, 고이치, 리쿠코, 유즈키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이렇게 평탄한 이야기가 픽션으로서 매력을 가질까 싶을지도 모르겠다. 리뷰를 적고 있는 입장에서도, 사실 이런 '뭉툭한'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해 놓고 어떻게 소설이 됐을까 싶은 의문이 불쑥 고개를 든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에쿠니 가오리만의 '향취'가 되는 것이리라. 굳이 비유를 하자면, 실사 배경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느낌이랄까. 소설의 세계관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감을 주는 반면에 인물끼리 부대끼며 일어나는 갈등과 그것을 써 내려간 방식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책 뒤표지에 적힌 내용만 봐도 그렇다. "아이 넷 중 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르다." 즉, 혼외자식을 둘씩이나 도맡아 키우는 부부라는 얘기다. 하나도 아니고 둘? (입양을 한 아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지만) 어떤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십분 물러서서, 결국 맡아서 키우기로 했다고 치더라도 죽이네 살리네, 몇 날 며칠 동안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두 아이가 '야나기시마 일가'에 들어오는 시점을 보면 그런 자극적인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생모를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열질 않나, 생부를 불러다 앉혀 놓고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테니 당신은 종종 찾아와 아이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주말 드라마에서 회장님 전문 배우인 한진희 씨가 자주 쓰는 대사를 좀 차용해다 써볼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생아가 생기기까지의 과정도 참,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내, 혹은 남편이 아닌 이성과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수순을 작가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그것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둔탁한 서술로 마무리한다. 바꿔 말하면, 독자들에게 이 사람이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논픽션인 것처럼, "그들이 사랑하게 된 것을 내가 어쩌겠느냐"는 식이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배척하라고 말한다. 읽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는 작가에게 살짝 약이 오를 정도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들어온 손님인데, 이렇게 막 대해도 되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뒷 페이지에 또 낭창낭창하게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마력이 있는 것을.


소위 '말 같지도 않은' 사건들을 써 내려간 방식 또한 기가 막히다. 무덤덤하게 써서 약 오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가족의 이야기를 쓰면서 1인칭 시점을 이렇게 잔인하게 돌려 쓸 수 있는가 싶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가족의 얘기를 할 때 많은 작가들이 3인칭 관점에서 내려다보며 훔쳐보는 즐거움을 같이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는 역시, 남들과는 좀 다르게 불친절하다. 가족 모두의 이야기가 아주 조금은 들어가 있긴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객체들의 생각이 얼기설기 연결되어 이뤄져 있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이어서 언제나 북적거리고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 비교적 많은 편이긴 하지만 결국 어떤 가족 구성원도 '나'와 같은 시점과 생각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사실, 작가는 이것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 책 뒤표지에 "가족이라 해도 결국은 모두 혼자가 아닌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싶다. 야나기시마 일가의 일대기를 보면서 나도 그 집에 살고 있는 아무개가 된 듯하여 잠시나마 행복했거늘. 결국 '식구(食口)'에 불과하다는 작가의 준엄한 아포리즘을 느끼고 나니 가슴 아프다 못해 외롭다는 기분이 스쳐간다.


다 읽어버린 소설에게 떼라도 부리는 걸까. 왠지 좋지 않은 얘기만 잔뜩 써버렸다. 사실, 좀 그런 면이 있는 소설이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엄지를 척 올리고 싶은 책은 아니고, 그렇다고 왜 이걸 다 읽고 있었는지 화가 날 정도의 열악한 콘텐츠도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약간의 섭섭함과 그리움이 잔잔하게 남는다. 단순히 독자가 아닌 야나기시마 일족의 누군가가 되어 키쿠노의 과거를, 리쿠코의 생각을, 기리노스케의 아픔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시간들. 아이들이 성장하고 자신들만의 색채를 가진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들. 청청했던 청년들이 늙은이가 되어 스러지는 과정들. 짧은 소설 속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같이 한 것처럼 느껴졌던 이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쉽다.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써놨다고 하면서도 사실 이미 다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그래서 위험하다. 시대를 앞서 가는 'Abnormal'이지만 그녀의 문장을 거치면 마치 평범한 일상처럼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마음을 쓰며 읽다 보면 나처럼, 책 뒤표지를 덮고 나서도 야나기시마 일가의 오늘은 어땠는지 궁금해지고, 더 이상 알 수가 없어 답답해지고, 가끔 다시 생각이 나면 서운해진다. 여운이 길어 다른 책을 펴보기 전에 조금 더 그들을 떠올려보고 싶다. 이쯤되면 중독인가.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한층 진화된, 에쿠니 가오리의 중독성 'Hazar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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