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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Nov 05. 2015

이사, 그리고 「빛의 제국」

#김영하,   #이사

커뮤니티의 이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 했다. 하나의 필요를 하나가 완벽히 채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은 군집하여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기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다. 누군가는 아기에게 젖을 물려주어야 하며, 걷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제외하고는 내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상당히 한정적이다. 이 가운데에서 서로의 의견을 합의하고 조율하는 역할이  요구된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자 존재이다. 인간은 커뮤니티로 시작하여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아간다. 가족→학교→사회 등 커뮤니티를 이사하기도 하고 이루면서 살아간다. 이처럼 인생은 커뮤니티의 이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사는 묘한 기대감과 두려움을 준다. 어릴 적 이사의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 '그 곳에서는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있을까?', '그 곳에 있는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일까?'하는 등의 기대를 품곤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과연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새로운 곳에서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이사를 하고 나면, 한 편으로는 이사 이전의 나의 모습을 완전히 잊을 때도, 이사 이전의 나의 모습을 몹시 그리워할 때도 있다.


정체성의 혼란


미국에서 3년이 조금 안되게 생활을 한 뒤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에 있을 적 함께 유학생활을 하며 힘이 되었던 가장 친한 친구를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창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친구는 나에게 Bless You라고 말했고 나는 습관적으로 Thank you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전혀 하지 않는 행동들인데 고작 미국에 몇 년 있었다고 미국 문화를 익혀온 우리이다. 햄버거를 먹을 때면 미국의 햄버거와 우리나라의 햄버거를 비교한다. '미국에 있을 때는...'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미국에 있던 내가 진짜 나인지, 우리나라에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나도 헷갈릴 때가 많다. 어쨌든 미국의 때는 묻었고, 물은 마셨으니 말이다.  커뮤니티의 이사는 정체성의 혼란을 준다. 중2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중학생 시절 우리는 미숙했고 아직 익지 않은 토마토처럼 시큼했다. 그때를 기억할 때 우리는 마치 내가 아닌 타자를 이야기하듯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 미숙하고 시큼한 시절의 나도 나인데 말이다. 커뮤니티의 이사는 과거의 나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체성은 혼란을 가져온다.


그리고, 김영하의「빛의 제국」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은 커뮤니티의 이사에 따른 정체성의 혼란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김기영은 북한으로부터 한국에 파견된 남파 간첩이다. 그는 20년이 넘게 한국에서 살며, 가정을 이루고 소비 문화에 잘 적응하여 살아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상부의 연락으로 북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에 김기영은 괴로워하며 고민한다. 이미 자신은 20년 전의 남파간첩 김기영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수입 영화업을 하며 아내와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 김기영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받는 순간 김기영은 북한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숨기는 도중 훈련받은 움직임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내 안에 두개의 정체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남파 간첩을 다룬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이사가 아닌, 누군가에 의한 강제적 이사에 반응하는 인물의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김기영은 북한과 한국에서 딱 반반씩 생을 살아 온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원래'라는 모습이 존재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살해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선택을 망설인다. 한국에 남는다면 가족을 지키고, 소비사회를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야만 한다.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스물아홉의  나는 나라의 부름에 의해 군에 입대하였다. 나는 군 생활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을 읽게 되었다. 사회→군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시점에서 북한→한국→북한의 기로에 선 김기영의 모습이 나에게 투영되었다. 분명히 군대에 처음 입대할 때에는 사회의 것들을 추억하며 찬양했는데 막상 사회로 나가려 하니 덜컥 두려움이 생겼다. '과연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준비가 잘 되어 있는가?' 하는 식의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어떤 소설보다도 잘 읽혔다.


자발적 이주, 강제이주, 그리고 나


으레 이사에는 두 가지의 이사가 존재한다. 자발적 이주와 강제이주. 자발적 이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스스로 이사를 계획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환경에 거부감 없이 적응한다. 그에 비해 강제이주는 두려움을 갖게 하며, 강제적으로 이사를 진행하려 하는 이들에게 저항한다. 이것은 지리적 위치의 이사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환경에서도 일어난다.

서른이 된 나는 이제 강제이주를 준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나에게 끊임없이 강제이주를 종용한다. 중고등학교→대학교→군대→취업→이라는 커뮤니티의 이사. 그리고 나는 그 변화 가운데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고민한다. 강제 이주민들은 힘이 없다. 용역업체의 몽둥이에 집이 철거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질 것을 알고 있다. 끝내 아쉬워 바라보고 저항할 뿐. 내 꿈과 개인성이 강제 철거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바라만  볼뿐이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저항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내 모습에 힘이 빠진다. 두려움과 정체성의 혼란이 뒤섞인다.

이 삶이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르네 마그리트가 위로해준다.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이 책의 겉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 연작이 실려있다. 낮의 하늘이지만 밤의 숲과 집을 그리고 있는 그림. 모순되지만 굉장히 안정 되어 있고 거부감 없는 그림. 그림 한 폭에 상반되는 이미지를 잘 녹여낸 작품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역설이 항상 같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역설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그림인양 느껴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헤겔의 휴일'에도 마찬가지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그는 우산과 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두 가지의 오브제를 한 그림에 담아냈다. 컵은 물을 담는 것이고, 우산은 물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한 그림에 담는다. 그는 이 그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르네 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나의 최근 작품은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평범하지 않게 작품 안에서 어떻게 물컵을 보여줄까? 별나거나 임의적이거나 서투르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외람되게 볼지도 모르지만 천재적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그릇된 겸손 없이 말입니다). 나는 컵 위에 줄을 그어 물컵을 여러 개 드로잉함으로써 시작하였습니다.  100번째 혹은  105번째 드로잉 후에 이 선이 확장되면서 결국은 우산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산은 컵 안에 담겨졌다가 결국 컵 아래로 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의문, 어떻게 물컵을 천제적으로 그릴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헤겔(또 다른 천재)이 두 개의 대비되는 기능을 지닌 이 오브제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란 어떠한 물도 인정하지 않는 (물을 거부하는) 동시에 물을 인정하기도 (물을 담는)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헤겔이 (휴가를 맞은 것처럼) 매우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였을 것 같아서 이 작품을 '헤겔의 휴일'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어쩌면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의 삶이 아닐까? 역설적이고 모순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림은 묘하게 안정적인 것. 굉장히 불안하고 이전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어가는 시기이지만, 묘하게 안정적인 것. 그것이 지금 내 삶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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