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다. 무라카미 하루키, 可不可?
얼마 전, 기사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가 연극화되어 한국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하니 책을 구해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검색해보니 꽤나 많은 중고책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아 보이는 상권과 양장본 하권을 골랐다.
관련기사: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125_0010437874&cID=10701&pID=10700
「해변의 카프카」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다무라 카프카. 15세의 남자아이이다. 조각가인 아버지를 두고 있다. 어머니는 다무라가 어릴 적, 배다른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다무라에게 어릴 적부터 "너는 네 어머니를 범하고, 네 누이를 범할 것이고, 나를 죽일 것이다."라는 저주를 퍼붓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 저주는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이다. 다무라는 아버지의 이 저주가 듣기 싫어서 가출한다. 집인 도쿄를 떠나 다카마쓰라는 곳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바로 나카타 씨이다. 나카타 씨는 2차 세계대전 말미 벌어진 어떠한 사건을 겪는다. 숲에 들어가 무슨 이유인지 모를 사건 때문에 정신을 잃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는다. 며칠 후 깨어난 그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전에는 글도 잘 읽고 똑똑한 학생이었으나, 깨어난 뒤로는 글을 읽는 방법을 잊었으며 어리숙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고양이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노인이 된 후 고양이와의 대화능력을 기반으로 잃어버린 고양이 찾아주기 대행업을 한다. 그러던 중 고양이 사냥꾼 조니워커를 만나고 그의 잔인함에 이성을 잃고 그를 살해한다. 그 이후, 무슨 일에서인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다카마쓰로 향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번갈아서 등장한다. 첫 장은 다무라의 이야기가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는 나카타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리고 다시 다무라, 나카타 순으로 이야기가 번갈아 소개된다. 비중도 엇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주인공은 다무라 카프카인 듯 싶다. 일단 책의 제목이 해변의 카프카이다. 나카타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이야기는 다무라의 이야기의 당위성을 주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15세 소년인 다무라 카프카의 성장기 소설이라 보는 것이 옳음 직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여러 관점으로 해석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에 어떤 소설들보다도 메타포를 많이 투영했기 때문이다. 사건 하나하나와 중간에 나오는 음악들 그리고 음식들까지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미를 담아 화면에 노출한다. 게다가 그의 소설은 시간과 장소의 법칙을 지키지 않는다. 회상하는 시간이 있기도 하고 시간의 뒤틀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그는 결말 부분에는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라는 이상한 장소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하루키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든 간에 책을 집필하는 순간 그는 독자라는 바다 위에 책이라는 배를 띄운 것이다. 책은 독자들의 조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내가 「해변의 카프카」에서 얻은 해석은 '선택'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누나를 항상 기억한다. 아버지는 매일 자신에게 오이디푸스 저주를 내렸다. 그것을 마음에 품었던 탓이다. 그는 다카마쓰에서 사에키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엄마라고 단정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무라는 그녀와 섹스를 한다. (몇몇 사람은 사에키가 엄마라고 말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엄마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도 한다. 사실 소설 어디에서도 그녀가 그의 엄마라고 명확하게 밝힌 것은 없지만 그것을 말로 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근친은 도덕적 금기이다. 그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한다. 그동안 자신이 거부하고 피하려고 했던 것은 그는 똑똑히 맞선다. 어릴 적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존재를 훼손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그리움에 맞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세계를 택하는가, 저 세계를 택하는가.
단순히 소설에서 그려낸 근친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소설은 문제 소설이 된다. 하지만 메타포로써 도덕적으로 금기돼있는 것을 표현했다라고 생각을 바꿔본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와 사람들의 가치관에 의해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하나의 규범이다. 그 규범은 자신 스스로 자신을 규정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규범이 될 수 있다. 그런 규범이 몸에 배면 어떠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불편한 선택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라는 규범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이 본인에게는 가장 편안한 행동이 된다.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야'라는 규범이 있으면 특정 상황이 아님에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규범은 긍정적일수록 자신을 긍정으로 만들고, 부정적일수록 자신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간다.
다무라는 자신에 대한 규범에 과감히 맞선다. 오이디푸스라는 규범에 맞선 것이다. 그는 예언대로 되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를 빼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소경이 된다. 그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다무라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버지의 저주대로 오이디푸스로 살 것인가, 다무라 카프카로 살 것인가.
우리의 삶은 카프카와 비슷하다. 가끔은 내가 정한 규범이 사실은 별 것 아닌데, 근친이나 살인을 행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도 있다. 그리고 그 규범을 위반하였을 시에 스스로에게 처벌을 하기도 한다. 특정 상황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나의 규범에 정한 대로 편히 살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저항해볼 것인가.
나는 규범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되거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라면, 또한 이전까지 해왔던 선택과 다른 선택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선택이라면, 저항해보길 권장한다. 저항했을 때 오는 그 죄책감과 낯설음에 어렵고 힘겨울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규범 안에서 선택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정한 규범 안에서 살더라도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반대로 낯설음은 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이 나에게 행복을 줄 수 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에 머물러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다. 현재의 순간이 모여 과거를 이루고 미래를 이루고 역사를 이룬다. 시간은 선택의 연속이다.
여담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라고 하는 책이 있다. 일보의 문화평론가인 고모리 요이치가 하루키의 극우 성향을 「해변의 카프카」를 통하여 밝혀낸 책이라고 한다. 다음은 책에 대한 소개문 인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해변의 카프카》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평가한 비평집. 1995년 한신 대지진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그리고 2001년 9.11사건과《해변의 카프카》를 연관 지어 하루키가 소설에 담고 있는 극우 성향을 추적해낸다. 즉 일본인들은 이 대형 사건들의 현재진행형 피해자가 됨으로써 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 전쟁범죄의 기억을 일거에 말소하는, 환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 치유 논리가《해변의 카프카》 속에서 핵심 알고리즘으로 구현돼 우익 이데올로기에 일조하고 있음을, 저자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전에 밝힌 대로 나는 해석이라는 것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고모리 요이치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 논리를 책으로 집필하기까지 그가 들인 노력과 진지함에는 박수를 보낸다. 아쉽게도 얼마 전 하루키의 인터뷰 내용은 그가 극우라는 고모리 요이치의 논리를 한 번에 무너뜨려 버렸다.
뭐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겠지만.
관련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17/0200000000AKR201504170477000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