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한달살기(16)/돌아오는 여행

북위 5도에서 35도로

by 호히부부

[호]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 방석을 까는구나


-나태주 시 ‘3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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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2월 초순의 한국 날씨는 꽤 추웠다.

기왕이면 더운 나라에서 한달을 지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북위 35도의 한국에서

북위 5도의 페낭으로 훌쩍 날아왔다.


한낮이면 30도를 웃도는,

적도 바로 위의 더운 페낭에서 한달을 살며 무더위와 씨름하다보니

이젠, 어서 따스한 봄이 시작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활짝 만개하는 봄날을 기다리고 싶다.


다시 한국이 그리운 것을 보면

이제 또 이곳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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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참 역마살(驛馬煞), 아니

항공살(航空煞)이 참 많이도 끼었나보다.

열두번째 한달살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직 못 가 본 많은 도시가 눈에 어른거려

머지않아 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새로운 나라로 가고 싶어질 테지만,

지금은 한국의 3월을 마음껏 즐기며

김치찌개와 청국장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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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에서의 한달살기는 여유로웠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의 암막 커튼을 열면

말라카 해협의 바다가 침대머리에서도 출렁거렸다.

27층의 고층 에어비앤비 숙소는 거리낌이 없었다.

바다 위 넓은 하늘을 채운 하얀 뭉게구름과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서 출항해 동남아 도시를 다니다

페낭에 중간 기항하는 대형 크루즈선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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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면 창밖 아래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구경하고,

토스트를 구워 열대 과일과, 한 잔의 커피를 데워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느릿한 아침을 먹었다.


오전엔 시내로 나가 이곳저곳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거나)

숙소로 돌아오면 11층에 있는 인피니티 풀에서 천천히 수영을 한다.

때때로 저녁 식후엔 혈당을 낮추기 위해

헬스장을 찾아 트레드밀이나 자전거타기 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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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다닌 한달살기 도시중에

페낭에서 지낸 숙소(트로피카나 218)는 다시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동남아 도시 치고는 비교적 비싼 숙소였지만

그만큼 무더운 도시 페낭에서 한달을 건강하게 버티게 해준,

오아시스같은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지구인 조지타운에 인접한 숙소여서

매일같이 삶의 날것 같은 조지타운 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다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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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페낭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그저 따뜻한 남쪽의 휴양지처럼 보였다.

바다와 햇빛, 그리고 한달살기 여행자에게 친절한 물가.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도시의 진짜 얼굴은 관광지 바깥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조지타운의 오래된 골목들은 단순히 낡은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와 다양한 민족이 겹쳐진 채 살아 숨쉬고 있었다.


20260221_195114.jpg 춘절 행사에 모인 사람들
20260215_121631.jpg 조지타운 선데이 마켓의 오후


페낭은 빠르게 변하려 하지 않는 도시였다.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 문화가 완전히 섞이지 않으면서도

충돌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냈던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다름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그대로 두는 것.


그 느슨한 공존이 이 도시를 오래된 채로 아름답게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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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에서 한달을 지내고나니 이제 몇몇 주요 시내버스 노선이 눈에 익었다.
처음엔 노선도를 들여다보며 어디서 내려야 할지 긴장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굳이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아, 다음 정류장이구나’ 하고 몸이 먼저 알아챘다.


특히 조지타운을 한 바퀴 도는 무료 셔틀 CAT버스는

더위에 지쳐 있을 때 우리의 느린 발이 되어주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흐르는 차 안에서
시장 바구니를 든 할머니들, 이어폰을 낀 학생들,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직장인들 사이에 앉아

우리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한달살기란 유명한 곳을 다 보는 일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처럼 같은 버스를 몇 번이고 타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노선이 익숙해지고, 정류장이 편안해질 때
비로소 그 도시는 우리를 잠시 받아들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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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익숙한 속도의 일상이 조용히 이어질 것이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인간극장을 보며 아침밥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고르고,
계절의 기운을 느끼며 하루를 차분히 채워가는 삶.


그 가운데 우리는 가끔 페낭의 오후를 떠올릴 것 같다.

서두르지 않던 사람들,

천천히 흘러가던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역시 조금 느려질 수 있었던 순간들을.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돌아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여행이다.


어쩌면 우리는
멀리 떠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길 위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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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닫힌 상점 앞

벽화만 남아 웃고


바람이 지나면

급할 것 없는

페낭의 트라이쇼


오래되고

느릿한 오후를

기다리고 섰다.


20260209_104050.jpg 페낭의 릭샤, 트라이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