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 참푸르부터 코피 오 코송까지, 9가지 미식 기록
[히]
페낭에 오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건 역시 음식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가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이고,
그중에서도 조지타운이 있는 페낭은 ‘아시아의 미식 수도’라 불릴 만큼 음식으로 이름난 곳이니까요.
한 섬 안에서 말레이, 중국, 인도 요리를 모두 맛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한달살이는 입이 참 즐겁겠구나 싶어 설렘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페낭의 식탁은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붉고 노란 원색의 향연, 윤기가 흐르는 진한 소스들.
기름기와 향신료, 매콤함과 달콤함이 뒤섞인 커리와 양념들….
다민족 국가답게 음식의 종류도 제각각이었지만,
화려한 겉모습에 압도되어 선뜻 숟가락이 가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 관리가 필요한 남편과 함께 하다 보니,
재료 하나하나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더군요.
페낭 식탁의 화려함 앞에서 오히려 선택이 조심스러워지고 어려워지는,
낯선 첫 만남의 순간이었습니다.
강렬한 향신료의 기세에 눌려 길을 헤매던 중, 우리 눈에 띈 곳이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들러 한 접시씩 음식을 담아가는
길거리 뷔페식 반찬가게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나시 참푸르(Nasi Campur)’ 혹은 ‘믹스 라이스(Mixed Rice)’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섞인 밥’을 뜻하는데, 하얀 밥 위에 원하는 반찬을 골라 담고
그 무게나 개수에 따라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대만 한달살기 때도 이런 가게를 흔히 보았는데,
페낭 역시 동네마다 있을 정도로 많더군요.
장기 여행객에게는 이보다 고맙고 반가운 곳이 없습니다.
현지의 다양한 음식을 눈으로 먼저 체험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보고 수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어떤 날은 매장에서 먹고, 어떤 날은 숙소로 포장해 오기도 했습니다.
현란한 페낭의 음식들 사이에서 만난 이 소박한 반찬들은 간이 강하지 않아
마치 편안한 집밥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여행 초반, 아직 현지 음식이 낯설고 맛집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또 하나 마음이 놓이는 곳은 쇼핑센터 푸드코트입니다.
나시 참푸르가 ‘현지 집밥 체험’이라면,
쇼핑몰 푸드코트는 ‘부드러운 입문 코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자극은 조금 순해 보이고, 무엇보다 선명한 메뉴 사진을 보고 고를 수 있다는 점이
여행 초반에는 꽤 큰 안도감을 줍니다.
페낭 역시 밖에서 사 먹는 문화가 잘 자리잡고 있습니다.
집밥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노점과 호커센터(오픈형 푸드코트)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빠르고 가볍게 한 끼를 해결하는 현지인들을 보는 것은 일상입니다.
나시 참푸르 같은 가게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한 달이나 머물면서
언제까지나 소심하게 반찬가게만 기웃거릴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가져다준 힘일까요.
며칠이 지나자 저절로 조금씩 용기가 생겼습니다.
길가다 우연히 현지인들이 북적이는 식당에 들어가 보고,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국민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붙었습니다.
그렇게 향이 진한 국수도 한 번, 볶음면도 한 번.
작게 담아 나눠 먹어보고 괜찮으면 다음에 다시.
페낭의 음식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페낭 아침의 작은 즐거움,
이곳의 전통적인 아침 식사 '카야 토스트(Kaya Toast)'입니다.
얼핏 서양식 브랙퍼스트와 닮은 듯하지만, 속내는 전혀 다릅니다.
두툼한 베이컨 대신 얇게 구운 식빵 사이로 코코넛 향 가득한 '카야 잼'과
두툼한 버터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얼굴을 내밉니다.
이 빵을 간장과 흰 후추를 톡톡 뿌린 반숙 달걀에 푹 적셔 먹습니다.
여기에 연유와 설탕이 들어간 진하고 달콤한 로컬 커피를 곁들이면
비로소 페낭의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 카야 토스트는 말레이시아 전통 커피숍인 '코피티암(Kopitiam)'에서 즐겨야 제맛입니다.
커피를 뜻하는 ‘Kopi’와 가게를 뜻하는 중국어 ‘Tiam’이 합쳐진 이름이지요.
작은 테이블과 낡은 나무 의자가 놓인, 동네 사랑방 같은 이 공간에서
현지인들은 카야 토스트 한 접시와 커피 한 잔으로
바쁜 하루를 빠르게, 그리고 든든하게 열어갑니다.
코피티암, '콩 타이 라이(Kong Thai Lai)'에서 마주한 카야 토스트 한 상.
투박하지만 정겨운 이 차림이 페낭의 일상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하루는 코피티암의 아침을 조금 더 깊이 느껴보고 싶어
조지타운의 오래된 골목 안, 작은 노포 ‘토순 카페(Toh Soon Cafe)’를 찾았습니다.
1950년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곳은 지금도 ‘옛 방식 그대로’를 고집합니다.
빵은 전기 토스터가 아닌 숯불 화로 위에서 느릿하게 구워내고,
커피는 일명 ‘커피 양말’이라 불리는 천 필터에 뜨거운 물을 부어
아주 진하게 우려냅니다.
카페 입구의 벽화는 이곳이 품어온 수많은 아침의 풍경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달궈진 철망 위에서 숯불 향을 입으며 구워진 식빵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바삭함과 고소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곁들인 커피 역시 더없이 진하고 강렬한, 검정 본연의 맛을 자랑하더군요.^^
(이때까지만 해도 이 강렬한 검정색 뒤에 숨겨진 설탕과 마가린의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행자들에게 꽤 알려진 곳이지만,
공간도 음식도 꾸며진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방식 그대로, 페낭의 진짜 아침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카야 토스트로 가볍게 아침을 열었다면,
조금 더 든든한 하루를 위해 현지인들이 선택하는 것은 ‘나시 르막(Nasi Lemak)’입니다.
말레이어로 '나시(Nasi)'는 밥, '르막(Lemak)'은 지방 또는 풍부함을 뜻합니다.
쌀을 물이 아닌 코코넛 밀크로 지어 밥알 하나하나에
고소하고 풍부한 풍미가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나시 르막을 완성하는 것은 밥 주변을 수놓는 고명들입니다.
고소한 볶은 멸치와 땅콩, 오이, 삶은 달걀이 기본입니다.
여기에 핵심인 매콤한 삼발(Sambal) 소스를 밥에 살짝 얹어 비벼 먹으면,
묘하게도 우리나라 고추장 비빔밥 같은 친숙한 맛이 납니다.
나시 르막은 먹는 장소에 따라 그 모습이 확 달라집니다.
바나나 잎이나 종이에 싸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파는 소박한 나시 르막은
단돈 500여 원에 바쁜 사람들의 든든한 아침이 되어줍니다.
반면 식당에서는 큼직한 튀긴 닭다리와 커리를 곁들여
푸짐한 한 끼 식사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오후의 출출함을 달래주거나 늦은 밤 야식으로 현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인도계 식당인 ‘마막(Mamak)’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사랑받는 메뉴는 ‘로티(Roti)’와 ‘난(Naan)’입니다.
로티는 밀가루 반죽을 공중에서 휘휘 돌려 얇게 늘린 뒤,
철판에 기름과 함께 구워내는 특유의 조리법을 거치며 다양하게 변신합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아 담백한 로티 차나이,
아이들이 환호할 만큼 높게 솟은 달콤한 로티 티슈,
반죽 안에 달걀을 풀어 넣은 로티 텔루르,
붉은 고기 양념으로 속을 꽉 채운 무르타박까지.
이름 뒤에 붙는 단어 하나에 맛과 모양이 달라지는 로티의 세계는
다채로운 페낭의 식탁을 꼭 닮았습니다.
로티가 기름에 구워낸 고소한 맛이라면,
반면, 난은 기름기 없이 진흙 화덕(탄두르) 벽에 붙여 구워내어 폭신하고 담백합니다.
덕분에 커리 소스를 살짝 곁들여 먹기에 부담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조금 더 본격적인 인도 요리를 맛보기 위해 찾은 곳은
‘딘디굴 비리야니(Dindigul Biriyani)’였습니다.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곳은 미슐랭 가이드가 인정한 맛집이자,
현지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입니다.
우리는 큼직한 닭다리가 든 인도식 정통 찜밥 ‘치킨 비리야니’와
고기 없이 향신료만으로 맛을 낸 양념 밥 ‘쿠스카(Kuska)’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차파티(Chapati)’를 추가했습니다.
기름에 구운 로티나 화덕에 구운 난과 달리,
차파티는 통밀 반죽을 기름 없이 마른 팬에 구워냅니다.
현지에서도 건강을 생각하는 이들이 주식으로 선택하는 ‘착한’ 탄수화물이지요.
소스들을 조금씩 밥에 얹어 비벼 먹거나 차파티를 찍어 먹다 보니,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섬세한 향기가
우리가 알던 인도 요리와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말레이의 고소함과 인도의 향신료를 지나,
이제 우리는 페낭의 진짜 저력을 보여주는 중국계 호커(Hawker) 음식들 앞에 섭니다.
페낭을 대표하는 국수를 꼽으라면 단연 ‘호키엔 미’입니다.
붉은 국물색만 보면 아주 맵고 강렬할 것 같지만,
새우 머리와 돼지 뼈를 정성껏 우려낸 국물은 보기보다 맑고 깊은 맛을 냅니다.
우리네 연한 짬뽕 같으면서도 새우 특유의 감칠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이 일품입니다.
재밌는 점은 페낭에서 ‘호키엔 미’는 이 새우 국수를 뜻하지만,
쿠알라룸푸르에서는 간장에 볶은 검은색 볶음면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이름 아래 지역마다 다른 맛이 숨어 있는 셈이지요.
미슐랭 맛집 ‘그린 하우스’의 새우 국수.
숟가락에 담긴 붉은 삼발 소스를 조금씩 풀어가며
나만의 맛을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페낭의 ‘아삼락사’는 단순한 지역 음식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별미입니다.
생선을 고아 만든 진한 육수에 ‘아삼(신맛=열대 과일 타마린드의 신맛)’의 새콤함이 더해진
그 독특한 풍미는 동남아의 수많은 면 요리 중에서도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맛을 보고자, 줄 서는 맛집을 찾았습니다.
탱글한 면 위에 잘게 부순 생선 살, 오이, 양파, 파인애플, 그리고 민트잎이 올라가 있더군요.
강렬한 국물 색에 비해 맛은 의외로 상큼하고 깊었지만,
솔직히 우리들 입맛에는 '귀한 경험 삼아 한 번 먹어본 것'으로
충분한 맛이었습니다.^^
아삼락사의 상큼함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음식이 있습니다.
중국계 이민자들의 전통 볶음면이자 페낭 길거리 음식의 상징인
‘차 콰이 티어우(Char Koay Teow)’입니다.
이 음식의 생명은 센 불에서 면을 날리듯 휘리릭 볶아낼 때 입혀지는 ‘불향(Wok Hei)’입니다.
짙은 갈색이라 짤 것 같지만, 직접 맛을 보면 짭조름함 속에
은은한 단맛과 해산물의 풍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기름진 볶음면이라 한 접시를 둘이 나눠 먹으니 양도 맛도 딱 적당했습니다.
태국의 팟타이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왠지 모를 익숙한 감칠맛은 팟타이가 한 수 위 같으면서도
이 투박한 불맛만은 페낭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화려한 색감의 음식들 사이에서 소박하지만 쉼표 같은 음식들도 만났습니다.
페낭 한달살기 여정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이들은
자극적인 입맛을 잠시 쉬어가게 해준,
페낭 식탁의 소중한 ‘숨은 주연’들이었습니다.
맑은 국수 ‘쿠에이 티아우 통(Kway Teow Th’ng)’은
이 도시 사람들이 매일 찾는 가장 익숙한 한 그릇입니다.
조지타운 중심가를 지나다 유독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식당을 발견하고
홀린 듯 들어갔습니다.
납작한 쌀국수 면에 피시볼, 어묵, 돼지고기 슬라이스를 얹어 맑은 육수에 내오는 이 국수는
화려한 커리와 붉은 국수들 사이에서 가장 담백하고 편안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찾은 곳은 6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식당이더군요.
쿠에이 티아우 통을 알고나서부터 골목 어디든 들어가 보면
작은 호커나 커피숍 메뉴판에 쿠에이 티아우 통이 보입니다.
대부분 식당에서 없는 곳을 찾기 더 어려울 정도로 흔하다는 음식이
최고로 입에 맞으니 이렇게나 좋을 수가.^^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의 ‘완탄 미(Wan Tan Mee)’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얇은 노란 면에 고기만두(완탕)와 차슈 고명을 얹어 먹는데,
우리네 우동처럼 친숙한 감칠맛이 느껴집니다.
면의 종류와 육수, 고명의 조합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하는
페낭 국수의 세계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강렬한 불맛이 가득한 거리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현지인들의 속을 가장 부드럽게 달래주는 일등 공신은
바로 ‘죽(Porridge)’입니다.
조지타운의 노포 ‘촉키’에서 만난 돼지고기 죽은
내장까지 함께 끓여내 국물이 깊고 진했습니다.
그 위에 바삭한 유탸오(튀김 빵)를 얹어 먹는 맛은 고소함 그 자체였지요.
이곳에서 죽은 단순한 환자식이 아니라,
수십 년 내공이 담긴 엄연한 전통 요리이자 든든한 한 끼 식사였습니다.
돼지고기 죽과 계란죽의 조합.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이른바 ‘소울 푸드’의 정석을 맛봤습니다.
얇은 전병 위에 푹 삶은 무채와 갖은 채소를 얹어 돌돌 만 ‘포피아’는
마치 페낭판 건강 샌드위치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구절판이나 월남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음식은
튀기지 않아 담백하고 속이 편안해 우리가 가장 애정하는 메뉴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자주 찾았던 ‘파당 포피아’는 은은한 새우 향이 일품이었습니다.
당 관리를 위해 빨간 삼발 소스를 아주 조금만 발라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삶은 무 특유의 단맛과 재료 본연의 감칠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포피아는 오전부터 점심시간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메뉴라서
오후에는 재료 소진으로 문을 닫는 곳이 많은데
파당 포피아는 오후시간대(대략 오후 2시 ~ 5시)에 운영합니다.
어떤 날은 소스를 따로 챙겨 숙소에서 가볍게 즐기기도 하고,
극락사로 향하는 길에는 마치 김밥처럼 싸가기 좋았고,
골목을 걷다 출출할 때면 든든한 간식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페낭의 밤이 깊어지면 호커 센터는 맥주 한 잔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더욱 북적입니다.
그중 ‘굴 오믈렛(Oyster Omelette)’은 얼핏 우리의 굴전과 닮았지만,
식감은 전혀 다릅니다.
달걀에 굴을 넣는 것은 같아도 타피오카 전분을 섞어
젤리처럼 쫀득하고 탄력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지요.
가벼운 안주로 주문했는데, 전분 덕분인지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을 만큼 든든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대표 꼬치구이 ‘사테(Satay)’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향신료에 절인 고기를 대나무 꼬치에 꿰어 숯불에 직접 구워내는데,
고소하고 달콤한 땅콩 소스에 찍어 먹는 맛이 독특합니다.
곁들여 나오는 오이와 양파, 그리고 ‘케투팟(Ketupat)’이라 불리는 쫀득한 쌀떡은
사테의 풍미를 더욱 살려줍니다.
밤의 정취를 즐기기에 이보다 좋은 안주가 있을까요?
다만 이곳은 술값이 비싸(병맥주 한 병에 거의 만 원!) 가끔씩만 누릴 수 있었던
소중한 사치였습니다.^^
페낭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를 꼽으라면 단연 ‘첸돌(Chendul)’입니다.
처음엔 그 선명한 초록색 국수 고명이 마치 불량식품처럼 생경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쌀가루와 천연 향료인 ‘판단 잎’ 즙을 섞어 만든 건강한 젤리더군요.
이 초록 국수 자체가 바로 ‘첸돌’이며, 이 빙수의 주인공입니다.
여기에 달콤한 붉은 강낭콩과 고소한 코코넛 밀크,
그리고 검붉은 빛의 ‘굴라 멜라카(야자 설탕)’ 시럽이 어우러집니다.
굴라 멜라카는 일반 설탕처럼 자극적으로 달지 않고, 흑설탕처럼 깊고 묵직한 풍미를 냅니다.
단맛이 걱정되어 “시럽은 조금만(Less Sugar)”을 외쳤더니,
바쁜 손놀림 중에도 흔쾌히 당도를 조절해 주었습니다.
디저트 성지로 불리는 ‘페낭 로드 유명 첸돌’은 1936년부터 시작된 전설적인 노점입니다.
한국의 미식가 백종원 씨도 극찬한 이곳은
전 세계 여행자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늘어섭니다.
화려한 카페가 아니라 뜨거운 햇살 아래 길가에 서서 먹는 맛,
그것이 첸돌의 진짜 매력입니다.
얼음을 휘휘 저어 한 입 크게 떠 넣으면
머리끝까지 짜릿해지는 시원함에 무더위도 잠시 잊힙니다.
첸돌은 단순한 디저트라기보다, 더위를 견디게 하는
여행자의 활력이자 시원한 위로였습니다.
미식의 천국 페낭에서 블랙커피를 즐기는 우리 부부가 마주한 가장 큰 난관은,
역설적이게도 이곳의 '전통 커피(Kopi)'였습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만의 진한 블랙커피를 음미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만,
페낭의 커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이곳의 커피는 기본적으로 연유와 설탕이 듬뿍 들어갑니다.
단순히 "블랙커피 주세요"라고 하면 보통 ‘코피 오(Kopi O)’가 나오는데,
알고 보니 이건 연유만 빠진 '설탕 들어간 블랙'이더군요.
설탕을 뺀 진짜 블랙을 마시려면 ‘코피 오 코송(Kopi O Kosong)’이라는
복잡한 주문을 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기면 될 줄 알았는데, 복병은 따로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 전통 방식은 원두를 볶는 과정에서부터 설탕과 마가린,
심지어 밀가루까지 추가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코송(비어있음)’을 외쳐도 태생부터 단맛을 품은 이곳의 커피는,
당 관리가 필수인 남편에게 영원한 ‘머나먼 당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낭에는 유명한 ‘화이트 커피’가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하얀 우유 거품이 올라간 우아한 라떼를 상상하게 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니 블랙커피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었습니다.
원두를 볶을 때 마가린만 넣고 설탕 없이 살짝 볶아 색이 연해진 것을 두고
‘백(白)커피’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입니다.
이름은 순수하지만, 정작 잔에 담길 때는
그 밋밋한 맛을 채우기 위해 연유와 설탕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블랙커피는 너무 써서 고통받고, 화이트 커피는 너무 달아 경계해야 하는
페낭에서의 씁쓸한 커피 탐험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익숙한 ‘스타벅스’와,
현지의 세련된 체인점인 ‘주스 커피(ZUS Coffee)’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퍼스트 애비뉴 몰 스타벅스에서 만난 100% 아라비카 블랙커피와
네모난 슈가 도넛 세트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도 달콤한 타협점이 되어주었습니다.
주스 커피 또한 로컬 브랜드지만 현대적인 스페셜티 방식을 따르기에,
설탕 없이 볶은 깨끗한 아라비카 원두의 ‘진짜 블랙’ 맛을 선사했습니다.
비록 투박한 노점의 커피 잔 대신 로고가 선명한 종이컵을 들었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깊은 블랙커피의 맛은
전통 커피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조지타운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오래된 2층 샵하우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블랙커피를 마셨습니다.
전통 코피티암 외관과 달리 커피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입니다.
완전히 로컬도 아니고, 완전히 체인점도 아닌 이 카페의 커피는
여행자에게 건네는 중간 지점 같습니다.
잔을 들어 향을 맡는 순간,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부드러운 커피의 향이 올라왔습니다.
말레이의 부드러움,
인도의 강렬함,
그리고 중국의 열정이 한데 섞인 페낭의 식탁.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모든 음식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낯선 맛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왜 이곳 사람들이 이 음식을 그토록 아끼고 찾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완전히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식탁에 함께 앉아 숟가락을 들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섬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입니다.
비록 건강을 생각하고 취향을 따지느라
모든 음식을 상상만큼 마음껏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페낭의 식탁은 한국 음식을 그리워할 틈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채워주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 한편에는
가끔씩이나마 정성스레 해 먹었던 익숙한 우리네 음식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덕분이기도 하겠지요.^^
이 소박한 한 그릇이 있었기에,
우리는 다시 용기 내어 페낭의 낯선 맛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