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벽 뒤에서 느낀 서늘함의 이유
[히]
수년간 세계 여러 도시에서 한달살기를 이어왔지만,
건축이나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습니다.
그저 예쁘면 좋고, 마음이 움직이면 행복한 여행자의 시선일 뿐입니다.
이번 페낭에서 만난 블루맨션도 그랬습니다.
19세기 말 동남아를 무대로 활동한 중국계 상인
청 팻츠(Cheong Fatt Tze)의 저택.
‘동양의 록펠러’, ‘지독한 사랑의 결실’ 같은 수식어는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했습니다.
30링깃(약 12,000원)의 입장료를 기꺼이 지불할 만큼요.
그러나 첫 인상은 의외였습니다.
“생각보다 볼 게 없네?”
100년 전 대부호의 집이라기엔 어딘가 투박했고,
전시된 유품 역시 오래된 살림살이처럼 보였습니다.
예쁘긴 했지만, '이게 다인가 '라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그 답답한 기운이 이 집의 본질이라는 것을.
중국식 중정 구조 위에
유럽식 장식과 말레이 전통 요소가 뒤섞인 공간.
동서양 문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은
그의 삶을 닮아 있었습니다.
광동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남아로 건너온 청 팻츠는
무역과 광산, 부동산 사업으로 부를 쌓은 인물입니다.
훗날 청나라의 외교관 역할까지 맡았던 그는
성공을 증명하듯 이 푸른 저택을 세웠습니다.
가장 사랑했다는 7번째 부인을 위해.
블루맨션의 2층에는 청 팻츠 가문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생활용품 몇 가지를 전시해논 전시실이 있습니다.
그중에 시선을 사로잡는 방은
단연 청 팻츠의 7번째 여인의 사진이 있는 방입니다.
그러나 이 집은 단순한 사랑의 상징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원형 복원 과정을 거쳐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헤리티지 호텔이자 관광 명소가 되었고,
과거 아내들이 머물던 방은 고급 객실로,
안뜰은 세련된 바로 변했습니다.
블루맨션은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인도차이나'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광고나 영화, 미디어들이 심어준 이미지가 작용하여
지금은 수많은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페낭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들었지만,
역사를 이어가며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은 결국 그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나 봅니다.
비록 이 집이 청 팻츠의 엄청난 부와 러브스토리를 불러내
유독 상업적인 장치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여행자의 감흥을 깨긴 하지만 말이죠.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한 장의 나무 장식에서 시작됩니다.
거실을 가로막고 있던 검은 금빛의 조각벽.
단순한 장식처럼 보였던 그것은 바깥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골든 스크린’이었습니다.
청 팻츠의 아내들이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
청 팻츠는 여덟 명의 아내 중 세 명만을 이 집에 들였고,
그들 역시 서열에 따라 배치된 방에서 엄격한 통제 속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전시실 속 흑백 사진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제야 현장에서 느꼈던 묘한 서늘함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블루맨션은
사랑의 궁전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성공과 집념이
비싸다는 '인디고 블루'로 박제된 공간이었습니다.
화려한 영화 속 장면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파란 벽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과
그 안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떠올려본다면,
이곳은 한 번쯤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공간입니다.
쉐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라는 명구가 언뜻 생각나는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