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기 중 떠난 하루 여행
[호]
여행은
새로운 장소,
낯선 풍경,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는 일이라고
그동안 생각해왔다.
하지만 며칠전 나는,
여행이란 어쩌면
속도를 바꾸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새삼 생각했다.
화창한 아침이었다.
아내와 나는 페낭 부두로 걸어갔다.
관광객보다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많았고,
누군가는 오토바이를 밀며 자연스럽게 배에 올랐다.
이곳에서 페리는 관광 상품이 아니라 일상의 교통수단이었다.
우리는 기대감 가득 페리(Penang Ferry)에 올랐다.
요금은 단돈 2링깃(약735원).
커피 한 잔보다 싼 값이었지만,
그 배는 우리를 전혀 다른 시간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가 천천히 부두를 떠나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다는 잔잔했고, 페낭의 시가지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바쁘게 돌아다녔던 항구의 제티들과 눈에 얼추 그려지는 조지타운의 모습.
불과 15분 남짓한 항해였지만 마음은 이미 먼 여행을 떠나는 듯했다.
한달간 머물고 있는 섬을 떠난다는 건,
풍경보다 먼저 속도가 달라지는 일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버터워스(Butterworth).
페낭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에는 벽화도, 줄 서는 카페도, 여행자를 위한 표지판도 거의 없었다.
대신 생활의 냄새가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그늘 아래 앉아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서두르지 않는 일상.
미리 생각해두었던 그랩을 불러 타고 우리는 북쪽 시골 마을로 향했다.
목적지는 캄풍 아공.
이름조차 낯설어 더 궁금했던 곳이다.
도심을 벗어나자 시야가 넓어졌다.
20여분 달렸을까. 낮은 집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였고,
길 양옆으로 야자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초록빛 들판이 펼쳐졌다.
캄풍 아공이다.
넓은 대지에 끝없이 펼쳐진 코코넛 숲과 논줄기.
입장료 18링깃(약 7천원)으로 누리는 이 초록빛 사치.
조지타운에서 페리를 타고 건너온 수고가 아깝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 곳 캄풍 아공(Kampung Agong)은 정부나 큰 기업이 만든 관광지가 아니다.
'아공(Agong)'이라는 별명을 가진 현지 농장주가
2만여 평이 넘는 자신의 코코넛 농장과 논이었던 곳을 정성껏 가꾸어 만든
민간 농장 겸 테마파크이다.
그래서 이름도 '아공네 마을(Kampung Agong)'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전통 가옥(Rumah Kampung)과 드넓은 논, 수만 그루의 코코넛 나무가 어우러져
관광객들에게 이국적인 풍광과 함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선사해
'말레이시아의 발리'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입구에서부터 포토존도 즐비하다.
거대한 새둥지 모양의 조형물이나 논 가의 그네 등,
사진이 잘 나오는 포인트들이 많아 주말이면 가족 나들이 명소이자,
말레이시아 예비부부들에게는 야외 웨딩 촬영 1순위 후보지라고 한다.
그러나 때마침 우리가 간 날은 평일 오전,
너무도 한산하기 그지없다.
논에서는 잘 익은 벼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벼의 색은 초록과 노랑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고,
그 옆으로 키 큰 야자수들이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도시는 소리를 만들어내지만, 시골은 침묵을 만들어낸다.
이곳의 공기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이상할 만큼 편안했다.
어디로 걸음을 옮겨도 구경 온 사람들이 없으니 적요만이 흐른다.
사진을 찍으면 그대로 작품이 될 것 같은 풍경 안에
사람이 없으니 조금은 생경하지만,
이 고요한 평화가 마치 몽땅 우리 것인 양 하고 마음껏 즐겨본다.
아무도 없는 논둑길을 전세 낸 듯 걸으며,
북적이는 관광지가 아닌,
진짜 말레이시아의 시골 마을에 머무는 듯한 사치를 누렸다.
미니 동물원에서는 염소, 닭, 타조가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은 코를 벌름거리며 내 손길을 기다리며 서있고,
앵무새는 당연 한국말을 몰랐다.
논을 내려다보는 야자수 사이에는 커다란 그네가 매여 있다.
관광객들에게 멋진 인생 사진을 찍으라고 만들어진 그네였다.
하지만 막상 올라타 보니 사진보다 먼저 바람이 느껴졌다.
몸이 앞으로 날아가듯 흔들릴 때,
발 아래로 논이 펼쳐지고 눈앞에는 하늘이 가득 찼다.
문득 까마득한 추억 하나가 함께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 어귀 그네에서
좋아했던 쬐그만 여자애가 봐주길 바라며
폼나게 그네를 차고 오르던 기억이 이 타이밍에 떠오르는 것은?(ㅋㅋ)
우리는 그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화려하지 않은 음식, 느린 서빙, 그리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분위기.
시계 대신 햇빛이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캄풍 아공에서 평일의 특권으로
오롯이 '우리만의 정원처럼' 시간을 누렸다.
북적이는 조지타운의 소음이
강 너머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순간이었다.
여유로운 오전 한때를 보낸 뒤 우리는 다시 그랩을 타고 이동했다.
버터워스의 대표적인 도교 사원인 토우 부 콩 사원(Tow Boo Kong Temple).
붉은 기둥과 황금 장식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입구의 용 조각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생생했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향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이 기둥은 중국 남방 사원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통돌(單石)’ 하나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전통 석조 조각 기술로 제작된 것인데 돌을 깎아낸 것이라기보다
돌 속에 숨어있던 용을 꺼내놓은 느낌이다.
이곳은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세운 사원으로,
‘투아 페 콩’이라 불리는 수호신을 모신다.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으로 향했던 이민자들은
항해의 안전과 삶의 안정을 기원하며 이 신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원에는 사업 번창과 행운을 비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향을 들고 고개 숙인 사람들의 모습은 조용했지만 간절했다.
종교라기보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잠시 앉아 향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소망도 저 연기처럼 어디엔가 닿고 있을 것 같았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교 사원의 도사(道士)가 주문을 외고
어깨를 두드리며 축원하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해가 기울 무렵 부두로 돌아와 또다시 페리에 올랐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다 위에서 바라본 페낭의 스카이라인은
아침보다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루 동안 우리는 멀리 이동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탄 것도, 긴 여정을 떠난 것도 아니다.
그저 바다를 한 번 건넜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음의 속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페낭이 ‘보는 여행’이었다면,
버터워스의 하루는 ‘머무는 여행’이었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휴가다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오늘은 진짜 여행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은 바다를 다른 속도로 건넜을 뿐이었다.
페리는 부두에 닿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야자수 사이를 지나던 바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여행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돌아왔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는 것.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계획에서 한 걸음 옆으로 벗어나는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